제209호

선풍기다! 얼마 전에 학교 갔다 돌아오니 선풍기가 안방에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 선풍기는 작년 여름에 나에게 지겹게 구박받던 늙은 선풍기인데 2000년 여름과 함께 컴백한 것이다. 겉모습은 그런대로 멀쩡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다. 미풍 단추를 누르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초고속 단추를 눌러서 조금 움직이게 만든 다음에 다시 미풍 단추를 눌러야 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각도 조절 손잡이는 아예 깨져 버렸다. 그래서 선풍기를 틀면 저절로 좌우 회전을 한다. 목욕하고 머리를 말릴 때면 선풍기 앞에서 절을 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선풍기가 돌아가는 대로 머리를 회전시키며 따라 다녀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선풍기를 구박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는 내 책장 크기 만한 멋진 에어컨이 있는데 엄마가 에어컨은 전기를 많이 쓴다고 선풍기만 틀어 주시기 때문이었다. 내가 엄마한테 에어컨을 틀어 달라고 하면, 엄마는 "여름은 원래 더운 거니까 좀 참어" "더우면 벗어!" "선풍기 틀어!" "에어컨은 선풍기 30대 트는 것만큼 전기가 든대" 하고 핑계를 대신다. 나는 저 선풍기만 우리 집에서 쫓아내면 에어컨을 틀 수 있을 텐데 하고, 선풍기가 완전히 고장나길 빌었었다. 그런데 선풍기는 내가 구박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엄마는 너무 더워서 잠을 못 잘 정도가 되면 그때부터 에어컨을 틀어 주신다. 작년 여름에는 우리 가족이 삼계탕 먹는 날 엄마가 처음으로 에어컨을 틀어 주셨다. 나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삼계탕을 먹으니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시원하고 좋았지만 에어컨도 꼭 좋지만은 않았다. 더울 때 에어컨을 틀었다 끄고 나면 에어컨을 켜기 전보다 더 덥다. 그래서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 놓아야 한다. 또 에어컨을 켜놓고 시원한 집에 있다가 밖에 나가면 숨이 콱 막힌다. 그래서 꼼짝도 안하고 집에만 있게 된다. 나는 에어컨도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차라리 저녁 산책 후에 엄마 아빠와 함께 수박을 먹을 때 옆에서 우리 가족처럼 끼여드는 선풍기가 더 좋아졌다. 눈에 보일 때마다 구박하던 선풍기에게 이젠 정이 들었나 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늙은 선풍기가 미지근한 바람을 보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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