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호

니련(수원시 권선구 매산로3가 교보타운 5동 402호) 누가 바래는 무명일까? 높푸른 하늘 자락을 부여잡고 깃발처럼 펄럭이는 잿빛 무명베를 바라다 본다. 순간, 파도처럼 일렁이는 연민의 정. 무명이 나인 듯, 내가 무명인 듯 현기증을 느낀다. 하지만 하늘은 여유를 주지 않고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소리없는 함성으로 부추기며 달랜다. ＇바래라! 하얀 무명처럼 너도 바래라…….＇라고. 지난 어느 날, 깨달음의 길을 걷기 위한 시문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내게 은사스님은 곱게 지은 무명승복 한 벌을 내놓으셨다. "두상이 청골인 걸 보니 소명하겠구나. 열심히 수행해 성불하거라. 그 길에서는 모든 욕망의 옷을 훌훌 벗어야 하느니라. 아니, 여자라는 이름의 옷마저도 벗어야 할 뿐 아니라 네 자신이라는 것조차도 벗어던져야 하느니라. 이제 너는 그 고독을 이기는, 그 고독을 바래는 항로에 들어섰느니라." 그날도 오늘처럼 청명한 날씨였다. 햇볕 머금은 가을 하늘은 말끔한 얼굴로 푸른 미소를 짓고 있다. 쪽빛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한 무명베도 그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듯 티없이 맑은 하늘 자락을 잡고 너풀거린다. 입산 직전 어느날 밤, 반야심경의 뜻을 간단히 요약해 놓은 책자를 뒤적인 적이 있었다. 그때 모든 게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 속에서의 꿈, 허나 그게 꿈인 것인 줄조차 망각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사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쳤고 그 허상에 대한 강한 집착은 나를 집요하게 좇아다녔다. 해서, 기왕에 꿈을 꾸고 있다면 가장 아름답고도 순수한 꿈, 연꽃 핀 꿈길을 홀로 걷는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가을 하늘엔 어릴 적 보았던 동화속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무지개 빛 별을 헤아리던 꿈 속 이야기가. 그 안에는 하늘 닮은 자애로운 님의 모습도 새겨져 있고 가슴이 따뜻하고 편안한 어머니의 얼굴도 담겨 있다. 졸린 듯한 한낮의 나른함과 가을볕 드리운 평온함이 스며 있다. 하늘, 그는 시리도록 푸른 눈빛을 내게 보낸다. 볕에서 해바라기 하던 무명베도 제 몸에 황금빛 문양을 아로새겨 넣으며 웃음짓고 있다. 뒤돌아보면 여인네의 애환이 서린 길쌈과 물레질, 무명을 발다듬이질하여 올곧은 모양새로 손질하던 미풍도 이젠 기억 너머로 저물어간다. 무명을 매만지는 일은 시계 바늘을 과거로 돌리는, 예여인네의 아프고도 서러운 세월을 다시 깁는 여행일 수도 있다. 아니, 동시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내게로의 반추여행일 수도 있다. 베틀로 한 올 한 올 곱게 짜내려간 무명을 잿물에 푹푹 삶는 일이 그렇고 그 걸 맑은 물에 헹궈내어 몇 번이고 뜨거운 햇볕에 말려 자연색을 탈색시키는 고달픔이 또한 그렇다. (내가 입는 승복은 그 과정이 끝난 다음에 이어지는 또 한 번의 고달픈 역사(役事)의 산물이다.) 곱게 바랜 무명은 진달래숯을 내려 주머니에 넣고 비벼서 얼룩지지 않게 자연색으로 들이는 작업은 바래는 작업보다 더욱 힘겹고 조심스럽다. 그러니 바래고 물들이는 빛의 창조, 그게 어찌 여인네의 숙명적인 몫만이겠는가? 어쨌든 출가이후 나는, 내 옷만은 손수 지어 입고 있다. 때론 숯 대신 기름기를 제거한 먹물을 쓰기도 하고 화환용 대나무를 재활용하여 숯을 만들어 곱게 빻고 먹물을 끓여내어 반반 섞어 천연 염료를 만들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손과 발에 양잿물이 스며들어 상처를 입기도 했다. 고무장갑과 슬리퍼를 착용했지만 속으로 스며 찬바람이 부는 날이면 쩍쩍 갈라지곤 했다. 인생사에 있어 어떠한 일도 도전하여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선 반드시 그 만큼의 고통이 따르며 이를 감내하여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교훈을 얻어낼 수 있었다. 뿐인가, 베를 볕에 바래 잿빛물을 들이기 위해서는 손보다는 마음이 먼저 자연의 빛깔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무명을 순수한 빛깔의 베로 바래는 작업은 세속인들의 몫일 수 있지만 은은한 빛깔의 잿빛 조화로 일궈내는 역할을 먹물 옷을 떨쳐 입은 나의 몫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구름처럼 인다. 하이얀 빛깔과 잿빛의 조화, 혹은 높푸른 가을 하늘과 잿빛 무명베의 조화로움, 이는 분명, 순수의 원형이요, 기다림의 원형이요, 아름다움의 원형이지 싶다. 진흙탕 속에서도 때묻지 아니하고 아기의 천진함을 간직한 연꽃의 순수성을 닮은 이는, 곧 하이얀 빛깔이 지닌 순수의 원형이다. 때로는 한낮의 달아오르는 태양을 이마에 이고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감내하여야만 하지 않던가. 이는 새살이 돋아나기만을 갈망하는, 잿빛이 의미하는 기다림의 원형이기도 하다. 또한 하이얀 빛깔과 잿빛의 조화, 높푸른 하늘과 잿빛 무명베의 절묘한 어우러짐 이야말로 이들이 이루어낸 완벽한 아름다움의 원형이요, 아름다움의 실체라 아니할 수 없다. 나의 마음을 실은 무명베는 순수의 여정을 향해 몸부림치 듯 펄럭이고 있다. 오늘도 푸른 눈빛의 가을 하늘을 우러르며 무명베를 바래 듯, 내 마음도 그렇게 바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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