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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기 시인의 우리고장 문화유적 답사기21
제228호

우리고장엔 비문과 서체 연구할만한 신도비 많아 암사동에 있는 이극배 신도비는 서울 유형문화제 제90호 우리 고장에는 비문과 서체를 연구할 만한 신도비(神道碑)가 많이 있다. 신도비는 글자 그대로 귀신이 다니는 길에 서 있는 비석이다. 죽은 사람의 평생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기원을 살펴보면 중국 송(宋)시대 5세기 초에 천자 및 제후들이 모두 신도비를 음각하여 세운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관련 자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언제부터 신도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살펴볼 수 없으나 후한(後漢) 장제(章帝) 2년 A.D 85년경에 세운 것으로 보여지는 낙랑의 점선현신사비가 현존하는 최고의 비석으로 추정되는 바 이 때부터를 기점으로 잡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신도비란 명칭은 신도(神道)에서 따른 것으로 보여지는데 신도란 풍수지리학에서 동남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부분의 신도비 입석 위치가 묘 뒤쪽에서 바라볼 때 동남쪽에 해당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신도비를 세울 수 있는 자격은 법전에 의거 규정된바는 없지만 증직(贈職)이 종이품가선대부(從二品嘉善大夫) 이상이며 사표(師表)가 될만한 업적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신도비는 대게 이수, 비신, 구질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비신 윗부분은 전액(篆額)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첫째, 암사동 산 12-1 광릉부원군 이극배(廣陵府院君 李克培)의 신도비를 찾아보았다. 서울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 앞에 문인석과 묘비 등이 놓여 있어서 각각 석인상의 모습, 비석의 형태, 석조기법 변천은 물론 이들과 함께 조선조 분묘제도의 특징도 잘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묘역이다. 신도비의 높이는 304㎝이며 비신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연산군 2년인 1496년에 입석하였다. 비좌와 비신, 이수부분을 모두 따로 만들어서 조합하였다. 비좌의 상단에는 복연문(覆蓮文)이 표현되어 있으며 측면에는 사방에 안상(眼象)이 2단으로 베풀어져 있다. 이수부에는 운문(雲文)이 사방에 묘사되어 있다. 이극배(李克培)는 1422(세종 4)-1495년(연산군 1)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峰),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해 식년 문과에 정과로 합격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세 번 다녀왔으며 육조를 두루 거쳐 1485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1493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하였으며 다시 광릉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그는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하였다. 경학으로 근본을 삼고 행정의 재능을 겸하였다. 오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사사로이 손님을 맞지 않았다. 내객이 찾으면 부재라 하고 돌려보내 불필요한 오해소지를 근절하고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일상생활도 검소하여 자손에게 경계하되 처세함에 겸손과 공양함이 가장 좋으리라 하여 두 자손 이름에 수겸(守謙)과 수공(守恭)으로 지어주며 세도를 자숙 경계하였다. 평소에 말이 없고 잘 웃지 않으며 가무(歌舞)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데 대체적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시 문장 글씨에 일가를 이룬 예조판서 신종호(申從濩)가 광릉부원군의 신도비문을 짓고 썼는데 그 중에서 명시(銘詩)를 번역해 보겠다. 「서울금석문대관」을 비롯하여 여러 책에 오자(誤字) 오역(誤譯)으로 인쇄하여 놓았는데 앞으로 출간되는 책은 오류를 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顯允我公(현윤아공) 훌륭하고 진실한 우리 공이여 爲世德首(위세덕수) 당세 덕의 으뜸이 되었도다. 宏度海涵(굉도해함) 넓은 도량은 바다와 같이 깊어 可以大受(가이대수) 큰 책임을 맡을만 하였다. 周歷六官(주역육관) 여섯 官을 두루 거치어 遂踐合斗(수천합두) 드디어 정승 자리에 올랐도다. 手持化樞(수지화추) 손에 治化의 권을 잡으니 群物咸作(군물함작) 모든 것이 興起하였다. 在公一毫(재공일호) 公에게는 털 하나쯤의 것이기에 付知淡泊(부지담박) 담담하게 여겨버렸다. 歸視其家(귀시기가) 돌아가 그 집을 살펴보니 門可羅雀(문가라작) 문에 참새 그물을 칠 지경이었다.(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貧家란 말) 操履氷玉(조리빙옥) 지조와 행실이 얼음 옥과 같아 不染纖塵(불염섬진) 조그만 먼지도 끼지 않았다. 規矩繩尺(규구승척) 規(圓을 그린 기구), 矩(角을 그린 기구), 繩(먹줄이니 直을 잡는것), 尺(자 長短을 헤아리는 것) 마냥 행동하여 以沒其身(이몰기신) 그 몸을 마치었도다. 廣津之南(광진지남) 광진의 남쪽이여 此焉幽宮(차언유궁) 이곳이 유궁(墓)이다. 我作銘詩(아작명시) 내가 銘詩를 지어 昭示無窮(소시무궁) 무궁한 뒷날에 분명히 알리노라. 강동구지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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