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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기 시인의 우리고장 문화유적 답사기 19
제226호

현 둔촌고가 둔촌약수터 자리, 위장병 피부병 특효 소문에 환자 몰려 둔촌선생 부친 종기 고쳤다는 국청사 우물이 바로 ‘둔촌약수’ 우리 고장에는 이름난 약수가 있었다. 둔촌동 산 82번지 현재 둔촌고등학교 교정에서 탄산과 철분이 다량으로 함유된 양질의 약수가 1935년에 발견 되었다. 충북 초정약수(椒井藥水)보다 맛이 진하고 탄산가스가 많아 톡 쏘는 느낌이 마치 단맛을 뺀 사이다 맛과 같았다. 약수노인정 이종기(李種基 76세)회장 말에 의하면 둔촌동에는 옛날 자연부락이 4개 있었는데 굴바위, 밖둔굴, 안둔굴, 양지마을(약수터) 이었다. 양지마을 주민 박흥업(朴興業)씨가 논에서 우연히 약수를 발견하였다. 물맛이 특이하여 관계 당국에 수질 검사를 의뢰하였다. 당시 일본 동척회사 땅이어서 그들이 철조망을 치고 사이다 공장을 신축, 운영하였다. 신문지상에 대서특필하고 기념으로 우편엽서에 사진까지 실어 널리 선전하였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고 만병통치가 된다하여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부 사람들은 사대문 안에 약수를 배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광천약수(鑛泉藥水)」라 불렀다. 근처 성내동에서 금이 발견되어 「백년금광」과 「구성금광」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나루약수」「천호동약수」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나중에는 「둔촌약수(遁村藥水)」라 불렀다. 8·15 광복이 되자 사이다 공장은 없어지고 약수터는 유원지가 되었다. 누구나 자유로히 와서 상탕, 중탕, 하탕에서 약수를 직접 음용하였다. 본인도 1970대까지 약수터 학생들이 등교길에 떠 온 약수를 계속 마셨는데 1980년대에 이르러 도시화가 되면서 지하수 오염으로 인해 약수를 못마시게 되었다. 둔촌약수는 폐쇄되고 그 자리에 약수같이 깨끗한 마음, 약수같이 항상 마르지 않는 인정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교육의 요람인 둔촌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2000년 10월 3일 둔촌고등학교와 약수경로당과 둔촌향민회에서 가로 1.5m, 세로 1m 크기의 화강암에 약수터 유래를 적은 표석을 세워 놓았다. 이 일대에는 약수고개를 비롯하여 약수가든, 약수다방, 약수상회, 약수중국집 등 약수라는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둔촌약수는 없어졌지만 약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보훈병원을 지나 국청사지(國淸寺址)를 찾아 보았다. 석탑이나 주춧돌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일인(日人)이 약수터 조경을 할때 모두 옮겼다고 한다. 유명한 우물은 흔적도 없이 메꾸어져 버렸다. 둔촌 이집(遁村 李集)선생과 국청사 우물에 얽힌 전설을 떠올려 보았다. 둔촌선생의 아버지 등에 생긴 커다란 종기가 국청사 우물 물로 깨끗이 치료된 것은 이 약수의 효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굴바위에 앉아서 둔촌선생이 이곳에서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선생에게 보낸 시 한 수를 읊어 보았다. 記後題詩不可遲(기후제시불가지) 遁村深處有歸期(둔촌심처유귀기) 蟻床長日無人問(의상장일무인문) 聊復高聲讀記詩(료복고성독기시) 그대의 시를 보고 시를 지어 보냄이 늦어서는 안되기에 멀리 떨어져 사는 둔촌에 한번 올줄 기대했는데 검은 책상 길고 긴날 찾아오는 사람 전혀 없어 잠깐 다시 소리높여 기와 시를 읽었네. 강동구지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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