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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선생 … 정 영 숙(수필가)
제228호

유별난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이름보다 별명 하나 버젓한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남다른 게 있다면 그는 지독한 음치이나 노래 부르기를 꺼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래라면 사양하는 법이 없거니와 자청해서 마이크를 앗아쥐고 그의 애창곡 김삿갓을 부른다. 첫 소절인 ‘죽장에 삿갓 쓰고-오’까지는 그럭저럭 리듬을 따라잡는다. 한데 다음 ‘방랑 삼천리-’ 부터는 그야말로 대책 없는 방랑 삼천리다. 그 스스로도 어느 소설에서 곤두박힐지가 겁나는 듯 아예 미간이 묻히도록 눈을 감아버린다. 그의 지정곡은 언제나 <김삿갓>이고, 그래서 붙여진 별호가 ‘삿갓 선생’이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만장이 폭소와 함께 갈채를 보낸다. 그렇다고 야유 섞인 환호를 보내는 건 결코 아니다. 그가 아니고선 누구도 연출해낼 수 없는 뜨거운 불길이랄까, 혹은 절규랄까, 그의 노래는 한편의 모노드라마 같아서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려놓는 흡인력 같은 게 있다. 그는 노래를 목청으로 부르는 게 아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오직 그 하나에 순명을 바치는, 흡사 늙은 종지기의 마지막 타종처럼 그 울림이 비장하다. 죽을 때 단 한 번 운다는 가시나무새의 노래가 이처럼 간곡했을까. 불측지변의 음정 탓으로 그의 노래는 확실히 얄궂다. 느닷없이 치솟고 휘어박혀 듣는 일 자체가 힘들고 숨가쁘다. 그러나 시종일관 그의 노랠 경청하는 까닭은 듣는이로 하여금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그 원색적 일갈에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때로 사람은 어떤 정선된 형식의 일탈로부터 은폐되었던 제 얼굴을 만난다. 프리마돈나의 유려한 음색보다, 저잣거리의 거친 장타령에서 더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듯, 나는 삿갓 선생의 노래에서 노래 이전의, 혹은 언어 이전의 길들지 않은 야성을 느낀다. 얼마 전, 어느 TV에서 음치 클리닉 현장을 보도한 적이 있다. 악음발성에 결함을 가진 이들이 모여 시퍼런 플라스틱 물통 하나씩을 뒤집어 쓰고 고래고래 모질음을 쓰고 있었다. 보기에 딱하고 민망했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절박한 상황으로 몰아갔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든 건 역시 삿갓 선생 때문이다. 음치란 모든 소리를 자기의 성조(聲調)로 인지하기 때문에 제 소리가 어떻게 틀리고 있는지를 모를 뿐이라고 했다. 조금 불편할지언정 결코 수치일 수는 없는 것이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차고 넘쳐 식상한 요즘에사 차라리 음치의 노래는 얼마나 독특하며 창조적인가. 나는 삿갓 선생을 ‘명창’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사람 만큼 당당한 음치를 못 보았거니와, 이 사람만큼 방랑 시인 ‘김병연’의 탄식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대로가 비창(悲愴)이다. 가슴이 몹시 답답할 때 나는 그의 창법으로 노래하고 싶다. 그러나 그의 ‘비창’은 아마 차이코프스키가 살아 돌아와도 모창이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유난히 그의 노래에 반하는 까닭은 삶에서의 장애적 요소를 ‘장애’로 여기지 않는 그의 우직스런 열정 때문일 터, 인간의 열정은 ‘신성(神性)에의 어떤 취기(醉氣)’라 하였다. 우열을 가르는 양식의 잣대를 벗어나 우리네 삶의 희비를 대신 토로하는 게 노래라면 적어도 이 사람, 노래의 장인(匠人)이 아닐까. 남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마음쓰지 않는 사람, 세상 상식의 기준보다 자기의 비위에 더 정직한 사내, 나는 그를 참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한다. <내 영혼의 오두막> 저자

토요저널  hhr@toy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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