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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운이(雲伊)…초우 장돈식
제227호

초 우 장 돈 식 수필가/「빈산엔 노랑꽃」 저자 창문 너머 앞산을 바라본다. 다가서는 절벽 위에 한 그루 외로운 노송이 있다. 그윽한 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내 벗이다. 나무야 많고 모두 다 사랑스럽지만, 그 중에서도 더 정감이 가는 나무가 있다. 바로 저 소나무다. 수령이 100년은 넘었고 200년은 안 되었을 것 같다. 천 년을 사는 소나무의 나이로는 아직 젊다. 저 소나무 껍질을 닮은 내 얼굴의 깊은 주름에는 살아온 세월만큼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아직 거동이 불편하진 않지만 사람의 수명으로는 황혼이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70여 년 대하다 보니 그나마도 정이 들었다. 이제는 그레고리 펙의 얼굴과 바꾸어준다 해도 마다할 것이다. 외진 곳에 산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저 나무와 좋아지낸다. 서로 바라보며 정을 나눈 지도 어언 6년이 된다. 내가 상심할 때 저 솔은 축 늘어져 시름하는 것처럼 보였고, 내게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면 제가 어찌 감을 잡았는지, 덩달아 가지가 우줄우줄하는 듯하다. 오래 전 문단의 원로 임옥인 님의 초대를 받아 천호동 교외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찾은 적이 있다. 선생은 정원을 안내하며 “저것 보세요. 나무들이 나를 반겨 잎을 흔들잖아요. 아침에는 더 반가워 가지까지 너울거려요” 하셨다. 감성 넉넉한 분의 과장된 느낌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에서야 선생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3년 전부터 솔잎혹파리가 끓더니 나무가 시름시름 생기를 잃고 잎이 불그스레 타들어갔다. 이제 100여 살, 아직 젊은 나이에 몹쓸 병을 얻어, 속리산 소나무처럼 죽나 보다 걱정했다. 산림과 직원들에게 간청해서 줄기에다 수간주사(樹幹注射)를 하고, 그루 밑동에 구멍을 내고 약을 넣었다. 약석(藥石)의 효험이 있어 올 봄부터 ‘운이(雲伊)’는 새순을 내고 푸르름을 되찾았다. 운이는 내가 붙여준 저 소나무의 이름이다. 훤칠하고 썩 잘생긴 나무는 아니지만, 생김새가 아담하고 단정해 여자다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말(麗末)에 솔이(松伊)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시문(詩文)에 능해서. 솔이 솔이 하니 무슨 솔로 여기느냐 천 길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라는 시를 남길 정도로 고고한 성품의 여성으로 저 나무와 닮은 데가 있다. 그녀는 송도 사람이라서 솔이라 했다면, 여기는 백운산(白雲山)이라 운이가 걸맞은 이름 같았다. 여름날 새벽, 안개 너울을 벗고 푸른 자태를 보일 때에는 청운이(靑雲伊)요, 겨울철 흰눈을 이고 섰을 적에는 백운이(白雲伊)다. 때는 조선조 말엽 어느 날, 개미의 날개깃을 닮은 솔씨 한 알이 날려 하필이면 절벽 위 바위틈에 떨어졌다. 싹을 티웠으나 씨젖을 다 먹고 난 후 뿌리내릴 흙이 없었다. 어린것이 기갈은 오죽했을까. 푸근한 흙에 자리잡은 다른 솔싹들은 쑥쑥 잘도 커가는데, 메마른 바위 틈새에서 모진 삶을 사느라 마디게 자랐을 것이다. 운이가 싹을 틔운 곳은 높은 벼랑 위인지라 자라는 동안 풍문으로 듣고 본 것이 많았을 것이다. 명성황후가 왜(倭)의 망나니들에게 시해된 것을 들었을 때가 서른 살이었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안 것이 마흔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독립을 하겠다며 부르짖는 만세 소리도 들었으리라.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20년, 황해가 바라다보이는 황해도의 어느 마을에서, 먼 훗날 자기와 벗이 될 한 사내아이가 태어나 자라고 있는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자지러지는 것도, 광복을 했다며 들떴던 우리 나라가 동강난 일, 동포가 서로 싸우는 비극도 다 보아서 아는 운이다. 척박한 바위틈이라 나이테는 80~90년을 만들었을 터인데도 겨우 기둥 굵기가 됐을 무렵이었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잘생기지 못한 나무는 쓸 곳이 없는고로 오래 산다”라는 말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저 나무는 연료가 귀하던 시절에는 나무꾼의 발이 미치지 못하는 벼랑에 섰기에 베임을 면했고, 영양이 부족해서 늠름하게 자라지 못해 건축용 벌채도 면했을 것이다. 이렇듯 운이는 다른 나무들이 싫어하는 곳에 뿌리내렸기에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토요저널  hhr@toy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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