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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단상-다시 산을 오르며
먼 데서 바라본 산이 나를 유혹한다. 갖가지 옷으로 치장하고 나를 부른다. 저리 호화롭게 치장을 하다니,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렇게 고운 색을 내뿜을 수가 있을까. 오랜만에 가진 여유를 산에게 모두 앗기고 만다.

산을 오른다. 오랜만의 등산이다. 그리 바쁜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찾은 산은 내게 냉정하지 않다. 어제 만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해 준다. 전에 왔을 때와 똑같이 내 눈을 끌어가기도 하고, 더러는 장난치듯 나를 힘들게 하여 땀도 흐르게 한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단풍은 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처럼 화장하지 않고, 본 모습을 보여준다. 먼 데서 보았을 때는 한 덩이의 사물처럼 붉게만 보였는데, 와서 보니 제각각이다. 빨강, 노랑, 파랑 없는 색이 없다. 갈바람이 찾아들자 제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 치마폭을 움켜쥐고 서두르나 들키고 만다. 온전하고 예쁜 것들 속에는 더러 까칠하게 마른 것도 있고, 벌레에 육신을 뜯기고 상처투성인 것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별 상관없이 함께 어우러진다.

이렇게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는 단풍이 부럽다 못해 경건하게 보인다. 제 색을 고집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그리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자연도 이리 어울리며 사는데 우리 인간만이 제 목소리를 내려 안간힘을 쓰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오르는 길은 언제나 내 숨을 몰아간다. 하지만 그때마다 산은 내 눈 앞에 더 가까이 와 어른거린다. 한 자는 가까이 다가서서 나를 반긴다. 허리 굽은 나의 신체는 엄살을 부려도 결코 엄살을 들어주는 법이 없다. 내 스스로 해결하기를 요구한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숨고르기를 한다. 속에 든 묵은 찌꺼기를 모두 내보내고, 정기어린 산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다. 그 숨길을 따라 신선한 공기가 가슴 깊이 파고든다.

저만치 앞서 가는 사람이 부럽다. 나도 전에는 저렇게 힘 있게 올라갔는데, 나이는 숨길 수가 없는가 보다. 나무 그늘에 지친 몸을 맡기고 올라가는 젊음을 바라본다. 잠시 욕심에 찼던 내 눈에 들어오는 나무. 바위 위에 얹히어 목숨을 지키고 있는 것이 나에게 넌지시 훈계한다. 다른 나무들이 모두 산등성이 볕 좋은 곳에 있고, 자신만이 이 열악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도 넘보지 않고 살았노라고 꾸짖는다. 만족하고 살아라. 잘났다고 뽐내지 말고, 못났다고 울지 마라. 옆의 친구의 자리를 탐하지 말고, 오로지 네 자신의 자리에 만족해하고 살아라.

다시 일어나 산을 오른다.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길에 나무는 제 뿌리를 내어놓았다. 사람들이 오르기에 좋게 제 몸을 밟고 가라 한다. 제 몸에 아픔이 오고, 제 몸에 상처가 나는데도 기꺼이 내어 놓았다. 사람처럼 제 몸만을 위하여, 제 가족만을 위하여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족들을 위해서도 할애할 줄을 안다. 이웃 나무가 내 곁으로 뿌리를 내리면 빗겨 설 줄도 알고, 같이 오순도순 대화하며 살아갈 줄도 안다. 제 키가 크다 하여 뽐내는 것이 없고, 제 잎이 넓다 하여 자랑하는 법이 없다.
선들바람이 찾아오면 같이 맞이하고, 찬바람이 밀려오면 같이 떨면서 긴 밤을 지새운다. 낮에는 산새와 벗하고, 밤에는 골짜기 물소리와 벗한다. 그러다가 풀벌레가 외롭다고 보채면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낸다.
거제의 산은 바다와도 같이 어울린다. 언제나 이웃은 바다이다. 그래서 멀리서 찾아오는 파도소리에도 소홀함이 없다. 늘 같이 맞아들여 함께 살아간다. 어쩌다 파도소리가 뱃고동소리까지 데리고 오면, 늘 함께 한 친구처럼 반갑게 맞아들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하다. 제 자신만을 생각한다. 남의 자리를 탐하고, 저보다 나은 것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서로 어우르지 못하고, 헐뜯고 비방하기를 일삼고, 제가 나설 자리와 숨을 자리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집단 이기가 횡행하고, 검찰과 경찰이 맞서고, 과학자와 기자가 사람들 앞에서 시시비비를 따지겠다고 한다. 재단과 교사가 대치하고, 여당과 야당이 멱살을 잡고 자기네들이 옳은 선량이라고 떠드는가 하면, 보수와 개혁이 삿대질이고, 백인종과 흑인종이 싸우는 와중에 황인종의 얼굴빛도 덩달아 물든다.

무리와 같이 가지 못하고 제 혼자 뛰어서 정상을 오르는 사람은 멋없는 사람이라고 산은 말하고 있다. 함께 어우러져 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라고 넌지시 말하다가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빙긋이 웃고 말 뿐, 정상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산이다. 늘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산, 그 산 앞에서 인간이기가 부끄럽다. 욕심 부리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산은 이렇게도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일까.

오랜만에 산에 오르니 피곤하다. 많은 것을 깨달았으니, 다리가 좀 아프면 어떠리. 아픈 만큼 더 성숙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황홀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강 돈묵/거제대교수

새거제신문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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