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과거 안기부의 도청 사건이 남녀를 불문하고 모이는 수다방에 전을 벌인다. 누구나 그 대화에 쉽게 끼어든다. 나름대로 생각들이 다 있어서 끼어들지만, 종내에는 「여기도 도청되고 있는 거 아냐」 하며 마무리한다. 언제나 이야기는 자신들의 대화도 도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서 멈춘다. 물론 도청 당해도 별 문제 될 것 없이 살면 그만이쟎느냐고 빈정거릴 사람도 있겠으나, 참으로 딱한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의 능력이 모자라서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의 탈을 쓰고 있기에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런 것들이 바로 기본 양심에 어긋나는 일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인간이기를 거부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진즉부터 도청 운운할 때에 기술의 한계를 들어 정부는 그런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국민들을 우롱하여 왔다. 그것은 「하고 싶은데 기술이 없어 불가능하다」는 뜻이 되었던 것이다. 기술이 개발만 되면 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그 정부를 믿고 우매하게 입씨름만 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답은 적어도 도덕과 윤리에 근거한 대답이 나왔어야 옳았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할 수 없는 일이 없어졌다. 뭐든지 필요하면 다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어찌 보면 제 하고 싶은 일은 다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참 좋은 세상이라고 할지 모르나 그게 아니다. 우리의 사회가 병들고 있다는 것이다. 웬만한 병이야 의사에게 맡기면 그만이지만, 이 병은 치료가 어려운 난치병이라서 후유증이 크고 그 파장이 심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무슨 일이든 필요에 의해 채택하면 그만인 사회가 되었다. 지나칠 만큼 편리 위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이 일은 왜 해야 하는가, 해도 남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는가, 인간으로서 해도 되는 일인가를 따져서 집행되어야 할 일들이 결과만 챙겨보고 채택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과정은 모두 무시하고 결과만 중시 여겨 일이 진행한다면 그 사회의 생명은 길지 않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사회의 생명이 어떻게 길 수 있겠는가.

이번 안기부 도청사건은 전 국민들에게 불신의 사회에서 살기를 강요한 것이다. 이젠 남편을 믿을 수 없고, 아내를 믿을 수 없으며, 자식과 부모 사이에도 신뢰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필요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인간관계를 선보였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이 같은 불신사회에서 사는 국민은 불행한 국민이다. 통신을 하다가 잡음만 들려도 섬뜩 놀라고, 수화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달려 나가 사람을 눈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다가도 「혹시 여기는?」 하고 불안에 떨다가 필답을 할 것이고, 필답을 하다가도 「혹시 여기에 몰카가 없을까?」 주위를 살펴야 하는 우리는 불행한 국민이다.

현대인의 모든 질병의 원인에는 스트레스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이제 전 국민이 헤어날 수 없는 스트레스에 떨어야 한다. 한 마디 말인들 편히 할 수 없는 병든 사회에서 어떻게 사람을 신뢰하고 사업을 할 수 있을까?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유는 희망이 없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내 곁에 사람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것은 인간에게 엄청난 고통이고 불행이다.

우리 사회의 일반 소시민들이 못된 사람들을 흉내 내고 닮아간다는 데에 더 큰 심각성이 있다. 거짓말을 일삼는 위정자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다며 탄복하고, 이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으로 배우고, 그들처럼 행동하는 데에 쾌감을 느끼는 사회 풍조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도덕과 법률과 같은 현실원칙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무너지고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쾌락원칙만이 만연할 때에 그 사회는 무너지고 만다. 지금 우리의 사회가 그 혼돈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한시 바삐 현실원칙이 지배하는 사회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 혼돈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을 때에는 그들을 인도해 줄 위대한 인물이 나와야 한다. 어느 사회이고 그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큰 인물. 옳고 그름을 알려 줄 수 있고, 바라만 보아도 옷깃이 저절로 여며지는 그런 인물. 그런 큰 인물을 신은 왜 우리에게 내려주시지 않는 것일까. 불신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순진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신뢰의 사회를 구축해 줄 「큰 바위 얼굴」 같은 인물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오려나.

창문을 여니 벌써 가을 풀벌레소리가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이 풀벌레소리처럼 영롱한 소식은 없을까? 이 암담한 시기에 우리에게는.

강 돈묵/거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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