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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포토존 만들고 역사를 담는 사진동호회거제바다사랑사진동호회 - 구조라 진성, 지세포 진성 정기 출사

나이나 성별, 사진실력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진동호회가 있다. 지난 2018년 거제조선해양문화관 문화예술커뮤니티 ‘바다야 사랑해’(4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총 10회) 프로그램 바다사랑사진단 이수자들이 수료 후에도 사진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기 위해 결성한 거제바다사랑동호회(회장 김재윤)가 그 주인공이다.

거제바다사랑사진동호회는 여느 사진동호회처럼 정기적으로 모여 사진 교육도 받고 회원 간 작품을 품평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진동호회와 달리 특별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거제지역의 풍광을 카메라에 담아 관광 활성화를 도모하고 지역의 문화유적을 찾아 역사를 담기 위해 출사를 나가고 있는 것이다.

류정남 작가(라임 스튜디오 대표)가 지도교수를 맡고 있기도 한 거제바다사랑동호회는 생긴지 2년 째 섬꽃축제에서 사진전시회를 연 것은 물론 포로수용소 및 소노캄거제 호텔 & 리조트(대명콘도)에서 전시회를 열 정도로 파워 있는 동호회로 정평이 나 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직업, 다양한 연령에도 가족 같은 분위기가 넘쳐나는 것도 이 동호회의 특징 중 하나다.

역사를 잊은 사진에 미래는 없다

지난해까지 거제바다사랑사진동호회가 지역의 관광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포토존을 개발하는데 열을 올렸다면 올해는 거제지역 성곽을 중심으로 역사를 배우고 새로운 포토존을 만들기 위해 셔터를 누르고 있다.

회원들은 ​지난 2월 가배량 진성에 이어 지난 25일에는 구조라 진성과 지세포 진성 출사를 진행했다.

처음 계획은 구조라성과 샛바람길을 중심으로 출사를 진행하는 것이었지만, 누구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동호회 회원들의 열정으로 인근에 위치한 지세포 진성까지 촬영에 나선 것이다.

이날 회원들이 촬영한 사진은 이후 촬영될 거제지역의 성곽사진과 함께 오는 가을에 열릴 섬꽃축제 행사장에 전시 돼 거제시민은 물론 전국에서 모여든 관광객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지세포진과 지세포진성은 왜 만들어 졌나?

조라진이 최초로 만호를 두고 군사를 주둔시킨 것은 성종(成宗)원년(1470년)이다. 그렇다면 지세포진은 왜 군사들이 주둔하는 요충지였으며 성을 쌓게 됐을까?

구조라성과 가장 가까운 조선수군의 기지는 지세포진으로 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이미 1425년 이전에 진을 설치했으며, 세종 25년인 1441년에는 만호를 임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건국 이후 거제지역은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다. 삼별초 항쟁으로 거창 등으로 강제 이주를 해야 했던 거제지역민은 삼별초의 세력이 없어진 후에도 거제지역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는 고려말 중국과 한반도에 가장 큰 문제였던 왜구의 침략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때문에 고려말과 조선초에 왜구에 대한 토벌이 진행되는데 고려와 조선은 모두 3차례나 대마도를 정벌하게 된다.

첫번째의 대마도 정벌은 1389년(창왕 1) 2월 박위(朴葳)에 의해 이뤄졌다.

이 때 동원된 군대의 규모·장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함이 1백 척 이상 되었던 것으로 보아, 1만 정도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해 왜선 3백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우고 고려인 남녀 1백여 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정벌에 대한 기사는 너무 간략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과가 컸던 것으로 보아 왜국의 피해도 매우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년)에 있었다.

두 번째 대마도 정벌은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고, 남재(南在)를 도병마사,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이키도(壹岐島)와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 때 동원된 5도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나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점을 주목해 실행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세포진과 구조라진의 설치는 1419년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정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견내량에서 출정식을 갖고 날씨로 인해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한번 쉬었다 출발해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14일 걸린 이 정벌은 기해동정(일본에서는 ‘應永의 外寇<응영의 외구>’라 해서 외침으로 보고 있다)이라고도 한다.

당시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이며, 군사는 1만 7285인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했다. 정벌군은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 20일에 먼저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했다.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기도 했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지세포진과 조라진은 기해동정 이후 전략적 요충지로 설치된 셈이다. 기해동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조선에 항복하고 신하의 예로서 조선을 섬길 것과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했다.

또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으며 세종은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가 됐다.

기해동정으로 왜구를 정리한 조선은 1425년 세종 7년에야 고려말 강제로 이주 시켰던 거제도 주민을 다시 섬에 살게 했다. 실제 지세포는 대마도와 49Km 떨어져 있으며 고려와 조선초 통신사가 경유한 곳이기도 하다.

조라(助羅)라는 지명에 대해

조라라는 땅이름을 가진 곳을 전국에서 찾아보면 거제의 구조라와 충남보령의 조라포라는 작은 포구, 전남 여수의 현 소라면의 원래 지명이 조라로 사용됐다. 조라라는 이름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해안가의 포구가 있던 지역이다.

거제의 구조라의 지명유래는 구조라 지역의 지형이 자라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조라목, 조랏개, 조라포, 목섬, 목리 또는 항리(項里)라 불렀고 포구의 모양이 조래 (밥 짓기 전 쌀을 이는 도구) 모양이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거제와 보령 여수의 조라지역의 모두 해안선의 모양이 조래 모양의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세 지역의 해안선 특징이 닮아있고 ‘조랏개’와 음이 비슷한 해산물을 담는 그물도구인 <조락>의 특징처럼 입구가 작고 안이 넓은 포구였던 조랏개 면의 옛 치소가 현천마을이나 관기마을로 전해오고 있어 조라포는 지형의 특징 때문에 만들어진 땅이름으로 보인다.

구조라는 조선 성종(成宗)원년(1470년)에 이르러 조라진(助羅鎭)을 두고 만호병정(萬戶兵政)했는데 임진왜란 후 선조 37년(1604) 옥포진 옆 조라에 옮겼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되돌려 이때부터 구조라진이라 불렀다.

이후 영조 45년(1769년)에 방리 개편으로 항리방(項里坊)으로 불렸다가 고종 26년(1889) 조라도리(里)와 항도리(里)로 분할 개칭했다. 다시 6년 이 흐른 고종 32년(1895)에 칙령(임금이 내린 명령) 제98호로 조라리라 개칭 통합됐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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