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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 기성은 왜 폐왕성이 됐나일제가 지워버린 이름 ‘둔덕기성’... 고려 의종은 양위인가 귀양인가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이 사적 제590호에 지정 된지 10년째다. 둔덕기성은 신라와 고려시대 거제지역의 중심지를 보호하는 치성의 역할을 했고 특히 고려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사건인 경계의 난과 고려 왕 씨 몰락의 역사가 숨 쉬는 곳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10년 전 둔덕기성은 일제가 붙여 놓은 ‘폐왕성’이라는 이칭 대신 ‘둔덕기성’이라는 옛 이름을 회복하고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유적인 사적이 됐다.

그러나 둔덕기성은 여전히 폐왕성이라는 이칭이 붙어있다. 인터넷 검색은 물론둔덕기성을 설명하는 각종 문서나 논문, 심지어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제작한 관련 책자나 표지판에는 버젓이 ‘폐왕성(廢王城)’이라는 단어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

둔덕기성의 어두운 그림자 같은 ‘폐왕성’이란 이름은 누가 언제 왜 붙인 것일까?

일제가 지워버린 이름 ‘둔덕기성’

‘폐왕성(廢王城)’이란 명칭이 공식화 된 시기는 둔덕기성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1호에 지정된 1974년 2월 16일이다. 둔덕면민들은 오래전부터 둔덕기성을 피왕성, 기성, 토성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둔덕기성 또는 기성이 신증동국여승람(1530년), 동국여지지(1656년), 여지도서(1757년∼1765년), 증보문헌비고(1903년~1908년), 영남읍지(1895년), 거제군읍지(1899년)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있음에도 ‘폐왕성’이란 명칭이 공식화 된 배경엔 일제강정기의 고적조사가 한 몫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둔덕기성이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1970년대 당시는 지금처럼 정보나 자료가 정리돼 있지도 않고 많지 않아 당시 각 관공서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역사 자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폐왕성이란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자료는 1931년 11월에 발간된 ‘경남의 성지(慶南の 城址)’다. 경남의 성지는 진해요새사령부가 경상남도 지역의 왜성을 조사·연구하기 위해 당시 경상남도 지역의 왜성과 인근의 역사적인 성에 대한 여러 관련 자료를 모은 자료집이다.

진해요새사령부가 발행하고 검열한 이 자료는 표면적으론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 쌓은 왜성을 연구하는 목적이고 실상은 일제가 임진왜란 당시 만들어진 왜성을 중심으로 한 고적조사 자료인 셈이다.

경남의 성지 53페이지엔 경남지역의 왜성과 주변 유적지를 설명해 놓은 지도가 있는데 일제는 현재 ‘견내량 왜성’을 왜성동성(倭城洞城)으로 설명해놓고 인근에 둔덕기성을 원래 명칭인 기성으로 표기해놨다.

그런데 경남의 성지 54페이지에는 있는 표엔 둔덕기성의 명칭을 ‘폐왕성’으로 변경해 놓고 ‘고려 의종 때 축성, 고려 의종이 폐해 거제도로 유형(流刑)왔으며 당시에 축성 한 것’이라고 기록해 버린다.

또 경남의 성지에는 오량성과 구분해 인근 지역 인근에 ‘피왕성(避王城)’이라는 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정확한 연대 등을 알 수 없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둔덕면 및 사등면 일부지역 주민들이 둔덕기성을 ‘피왕성’으로 전해 들었고 지금도 일부 주민들은 둔덕기성을 피왕성으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뤄 경남의 성지에 기록된 피왕성은 둔덕기성과 동일한 성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1931년 경남의 성지 이후 79년 간 ‘폐왕성’이란 이름은 둔덕기성의 원래 이름을 지우고 원래부터 기성의 이름이 ‘폐왕성’인 것처럼 거의 모든 자료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매김했다.

일제가 둔덕기성을 폐왕성으로 바꾼 이유는 식민지 통치 수단으로 둔덕기성이라는 역사적인 이름보단 무신정권으로 폐위된 무능한 군주의 이미지를 덧씌운 폐왕성이 더 편리하고 적합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후 폐왕성이란 명칭은 일제의 검열 아래 1934년 만들어진 ‘통영군지’와 1937년 만들어진 ‘둔덕면세개요’에 고스란히 인용됐고, 둔덕기성이라는 이름은 국가사적으로 승격되고 나서야 제 이름을 찾게 됐다.

어렵게 찾은 이름인 만큼, 그리고 잘못된 개칭의 역사인 만큼 앞으로 둔덕기성이 설명될 때 둔덕기성의 이칭이 ‘폐왕성’이라는 설명 대신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둔덕기성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거제에 머문 의종 양위인가 귀양인가

둔덕기성과 관련된 역사 중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은 기록이 있다. 의종이 거제도에 머물게 된 것이 양위 후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는지 아니면 무신 정권에 의한 강제 귀양이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고려사엔 ‘己卯 王單騎, 遜于巨濟縣, 放太子于珍島縣(기묘일에 왕은 홀몸으로 거제현으로 피해갔으며 태자는 진도현으로 추방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종의 양위와 귀양에 대한 논란은 지난 2018년과 2019년 둔덕면 지역에서 ‘고려촌조성사업’ 및 ‘고려면’ 개칭 당시 주민 사이에도 논란이 됐고 국사편찬위원회에 질의와 답변을 받기도 했다.

당시 국사편찬위는 역사적 사안의 진위나 가부는 판정대상보다는 연구대상이며 고려 의종이 거제로 내려가는 기사에서 ‘손(遜)’자가 ‘쫓겨나다’라는 뜻으로 인용 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 일뿐 한자 본래의 뜻은 겸손하다, 순하다, 사양하다, 양위하다, 못하다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국사편찬위원회가 온라인으로 서비스하고 있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쫓겨나다’로 해석한 것은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9월 기사’ 등에 기록된 ‘방(放)’등의 의미를 참고해 해석한 것 같다고 했다.쿠테타를 일으킨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로 유폐 했다. 당시 의종이 머문 곳이 둔덕기성인지 혹은 거림리에 있던 기성현의 관아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무신과 명종은 수차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의종이 병이 생겨 동생에게 양위했으니 책봉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하지만 금나라는 무신정권의 외교 문서를 믿지 않았다. 의종에겐 22세의 장성한 태자(왕기)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구심을 품고 금나라 사신을 보내 조사하려고 까지 했다.

그리고 고려와 사대관계였던 금나라는 무신정변이 일어난 뒤 2년 동안 무신정권과 명종의 양위 및 책봉을 인정하지 않았다. 송나라도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3년이 지나서야 고려에 사신을 보내는 등 사실상 명종과 무신정권의 고려는 나라 안팎으로 왕위를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1173년 8월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은 거제에서 경주로 의종의 거처를 옮기고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는데 무신들은 김보당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려 조정의 요직을 독점하지 못했다가 이 사건 이후 주요 요직에 앉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또 1174년에는 의종의 시해와 문신 학살을 이유로 반기를 든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이 22개월 동안 무신정권과 맞섰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의 사료편찬 참여 등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는 의종의 재위 시절에 평가는 향락으로 국고를 바닥내고 백성들의 삶이 어렵게 했다 전해지지만 고려사를 살펴보면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백성들의 어려운 삶이 시작된 것은 오히려 무신정변 직후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고려시대 민란이 가장 많이 일어난 시기는 의종 사후 60여 년 동안이다. 의종의 실정의 경우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의종의 북진정책, 백성 구율, 왕권강화정책, 상정고금예문편찬, 고려상감청자 전성기 등 치세에 대한 업적은 ‘무신정권의 원인제공자’라는 그늘에 가려져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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