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샛노란 희망 하나 간직할 수 있다면서한숙 /거제스토리텔링협회 대표

그때 그 아이는 다섯 살이었다. 한쪽 눈을 찡긋한 채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렸던 고인의 손녀였다. 그런 그가 할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죽음을 이해할 리 없었다. 조문객들 또한 고인의 갑작스런 죽음을 쉬 받아들일 수 없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영결식 장면을 지켜본 나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V자를 따라 그렸다. 슬픔 저 너머로 보이는 샛노란 희망 하나 간직하고 싶은 바람이었다.

10년 만에 다시 그 아이를 보았다. 스마트폰을 통해 보았지만 훌쩍 큰 숙녀로 변모한 그는 언뜻 보면 알지 못할 정도였다. 고인의 친구였던 부시 할아버지(전 미국 대통령)와 팔짱을 낀 채 나란히 봉하마을 추도식장으로 입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그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예전처럼 V자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해맑은 미소는 여전했다. 고인이 잠든 ‘너럭바위’가 자리한 봉하마을은 그날도 추모의 노란 물결로 넘실거렸다.

이런 광경을 스마트폰으로 지켜본 나는 재생을 반복한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 아이를 주목하고 고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10년 전후의 영상이 겹쳐질 때면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진다. 샛노란 희망이 무엇인지 아이의 눈빛이 대신 일러주었지만, 현실은 아직 멀다. 예나 지금이나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꿈같은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하마을 추도식장은 샛노란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한편으로는 정치인들의 집결장과도 같았다. 그런 만큼 그들을 향한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 것도 사실이다. 그날은 서로 대결의 장을 펼치기보다는 다름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하는 눈치였다. 존중받아야 할 주체가 ‘특정인’이 아니라 ‘보통사람’이라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칙과 특권’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깨어있는 시민’으로 거듭나길 원하는 고인의 정신을 무시로 되뇌는 까닭이다.

그것도 잠시, 정치적인 속성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새다. ‘사람이 중심’,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구실에 불과한지 돌아서면 다시 구태를 재현한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언행으로 도리어 분열을 야기할 때가 많다. 대상을 둘로 쪼개는 이분법에 익숙한 나머지 진영논리와 이념에 매몰된 의식이 난무하는 현실이다. 국민의 알권리마저 패스트트랙에 태운 까닭인지 난투극을 벌인 끝에 통과된 ‘법안’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국민존중의 원칙과 통합을 중시한 고인의 정신과 상반되는 현상으로 보인다.

어찌하랴.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사회는 ‘사람 사는 세상’과 멀어져가는 양상이다. 보수와 진보가 극우, 극좌의 성향을 띤 채 국민을 볼모로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데 급급하다. 이도저도 아닌 중도의 존재는 허용치 않는 분위기이다. 정치위기가 경제위기로 치달은 지 오래다. 민생문제,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한 즈음이지만, 어느 쪽도 책임의식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위한 정쟁(政爭)인가. 누구든지 권력을 쥔 바로 그 순간이 적폐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나친 적폐청산은 양날의 칼일 수도 있다. 서로 다름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고 한 발짝씩 물러나야 한다. 그럼으로써 정쟁에 대한 관점도 자연히 달라지는 법이다.

복잡한 정치 셈법과 달리 국민의 삶은 현재진행형이다. 먹고사는 문제만으로도 버거운 지경이다. 나아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 융합적 사고의 필요성도 요구되는 터라 더는 뒷걸음질할 수가 없다. 정녕 국민을 위한다면, 하루속히 구태를 버리고 정치적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민생문제를 담보로 정쟁을 일삼아서도 안 될 일이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고들 하지 않던가.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 1분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0.4%이고 국민소득이 0.3% 감소했다고 한다. 경제성장률도 국민소득도 여전히 뒷걸음질하는 추세다. 이는 1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로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이에 실업자 수는 12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 경제가 미래성장 동력을 잃었다는 방증이다.

따라서 10년 만에 다시 보았던 그 아이의 성장점은 의미하는 바가 자못 크다. 한쪽 눈을 찡긋한 채 V자를 그렸던 고인의 손녀는 더 이상 과거의 ‘아이’가 아니었다. 먼 데서 온 미국손님과 ‘너럭바위’에 나란히 참배할 정도로 훌쩍 성장한 모습이 내심 부러워지는 이유다. 그렇다. 그 아이와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점이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정치현실이 쉬 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유산만큼은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 비단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거제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