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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재발견 - 옥포해전의 의미이 충무공 불패 신화의 시작, 왜군의 보급로 차단한 옥포해전,

‘옥포대첩기념제전’에서 ‘거제옥포대첩축제’로 이름을 바꾸고 프로그램 등에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한 옥포해전 기념행사가 6월 14일과 15일 새롭게 선보인다.
올해로 제57회째 맞는 이번 축제는 나라의 운명을 바꿨을 뿐 아니라 ‘성웅 이순신’과 ‘불패의 신화’의 서막을 연 옥포해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넘어 시민화합과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축제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옥포해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이 충무공 불패 신화의 시작

1592년 4월 왜의 선봉대는 부산포를 시작으로 조선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북진을 계속했다. 전쟁 시작 2개월 여 만에 선조와 세자(광해군)는 한성을 버리고 평양까지 쫓겨 간다.
개전 이후 계속된 패전으로 희망조차 사라질 무렵 첫 승전보가 조선 팔도 남쪽 끝 거제 바다에서 들려왔다.

이 한 번의 승리는 풍전등화에 앞에 선 조선의 운명을 되살리는 계기였고, 불패의 성웅 이순신을 만든 신화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선의 바다는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부산진 앞바다에 쳐들어왔을 때 왜군의 선단을 가장 먼저 막았어야 할 경상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군에게 연패해 전의를 잃고 겨우 판옥선 4척(협선 2척)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왜란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한 것은 왜군이 침공한 지 2일 후였다. 그로부터 20일 뒤인 5월 4일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주전함인 판옥선(板屋船) 24척과 협선(비 전투선?挾船) 15척, 포작선(비 전투선?鮑作船) 46척 을 이끌고 경상도 바다를 향해 출동했다.

5월 4일 새벽 여수를 출발해 남해군 미조항과 고성군 소비포(所非浦)를 거쳐 5월 6일 한산도에서 도착한 전라좌수군은 원균의 병력과 합류해 남부면 송미포(현재 남부면 다대포)에서 1박 한 조선수군은 다음날 새벽 가덕도 방면으로 북상한다.

낮 12시경 척후선이 옥포만에 약 30여 척의 왜선이 정박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기전을 쏘아 올려 본대에 알리면서 옥포해전이 시작된다.


신기전은 화살에 화통을 매달아 자체 추진력으로 로켓처럼 날아가는 화살로 옥포해전에선 공격용이 아닌 신호탄으로 사용해 신기전의 용도가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틀 후인 5월 6일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한산도에서 경상우수군(판옥선 4척과 협선 2척)과 합류한 뒤, 7일 아침 마침내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날 조선 수군은 왜선 26척을 격파한데 이어 영등포를 거쳐 합포와 적진포까지 왜 수군을 추격해 16척을 추가로 불살랐다.

옥포해전의 전술 ‘총통방중당파분멸(銃筒放中撞破焚滅)’

당시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사용한 전술은 ‘총통방중당파분멸(銃筒放中撞破焚滅)’로 함포의 사정거리 이내로 거리가 좁혀지면 재빨리 함포사격으로 왜군의 함선을 침몰시키고 이후 전선을 불사르는 방법으로 보인다.

난중일기 등엔 옥포해전에서 조선수군에 의해 구출된 소년의 증언이 나오는데 무수히 많은 탄환이 배 갑판을 뚫었다는 내용으로 미뤄 옥포해전에서 사용된 전술은 장거리 함포사격보다는 가까운 거리에서 총통을 이용해 대장군전, 장군전, 철환, 조란탄 등을 사용한 이 전술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이다.

왜군의 보급로 차단한 옥포해전

옥포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격파한 26척과 이후 합포와 적진포에서 격파한 16척 등 왜선은 왜군의 보급부대로 예상된다.

왜 수군의 주력 전투선은 세키부네(관선, 関船)로 왜 수군의 주요 전술인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에 적합한 배다. 하지만 옥포해전 등에 주로 격침된 배는 아타케부네(안택선, 安宅船)로 주로 대장선이나 병마와 병량을 운송하는 화물 수송용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에 격침된 왜선 42척 중 아타케부네가 28척, 세키부네 8척, 소형선인 고바야(小早)가 1척이며, 경상우수군이 격파한 나머지 5척의 경우 어떤 함선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 이순신이 옥포해전 승리를 알리는 장계엔 해전에서 얻은 전리품의 목록이 나오는데 ‘왜의 물건을 찾아내 5칸이 되는 창고를 가득 채우고도 남고 잡다한 물품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고 기록한 대목만 봐도 조선 수군에 격침된 왜 수군이 보급부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포해전은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일전이었고, 양측의 수군 전력이 노출된 첫 전투에서 대승은 곧 조선 수군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 전투였다.

반면 왜군은 첫 패배의 충격에 보급로까지 위협받는 등 심리적 부담을 안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고 이후 육지에서의 교전에 적잖은 영향을 받는다.


참고자료 =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난중일기, 거제시지, 조라지, 임진왜란과 거제도 해전사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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