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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포로수용소에 머물다 간 예술인화가 이쾌대, 시인 김수영, 소설가 강용준, 시인 정지용

거제포로수용소는 왜 유적공원이 됐나

거제지역에는 한국전쟁 때 거제포로수용소가 설치돼 수용된 포로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곳은 당시 포로들에게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고, 남·북한 당국은 체제 이념의 실험실, 국제적으로는 세계 질서 재편성의 축소판이었다.

거제포로수용소 잔존 유적은 잊어선 안 될 역사의 증거로 남았고, 거제시는 그 땅에 ‘체험학습형’ 관광을 모티브로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하 유적공원)을 세웠다.

하지만 유적공원이 만들어진지 20년 가까이 되면서 애초 유적공원이 전달하려던 ‘반면교사’의 교훈보다는 유명 관광지 역할에만 치우친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유적공원은 당시 남은 자료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포로들의 기억을 모티브로 다양한 전시관을 운영 중이지만 당시 포로수용소의 실상보단 한국전쟁과 이념의 갈등에 대해 치우친 면이 있는 데다 오래되고 낡은 유적공원의 기존 전시시설의 혁신 등 새로운 볼거리 마련이 절실해 보여서다.

특히, 유적공원엔 거제포로수용소 출신들의 수기와 문학작품을 모티브로 한 전시관이 필요해 보인다. 이들의 수기와 문학작품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당시 포로들이 느꼈던 비극적 절망과 단절·감금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동안 거제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출판된 문학 작품 및 수기는 1952년 이한 ‘거제도 일기(국제신보사)을 시작으로 2015년 송관호 ‘전쟁포로:인민군 출신 전쟁 포로의 마지막 증언(눈빛)’까지, 그리고 손영목의 소설 ‘풍화’와 ‘거제도’,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 강용준의 소설 ‘철조망’을 포함해 최인훈 작가의 장편 ‘광장’ 등 60편이 넘는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유적공원은 물론 포로수용소 및 전쟁포로 전문도서관으로 지정된 거제도서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다.

거제포로수용소에 머물다 간 예술인

거제포로수용소의 수많은 수용자 중엔 유명 예술가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화가 이쾌대, 시인 김수영, 소설가 강용준, 시인 정지용 등이다. 이들이 거제포로수용소에 머문 흔적을 소개하며 유적공원이 관광객만 맞이하는 공간이 아닌 문화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이쾌대 '자화상Ⅱ'

한국의 ‘미켈란젤로’ 이쾌대

1913년 1월 16일에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의 웃갓 마을 39번지에서 출생한 이쾌대는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장발에게 미술을 배운 후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휘문고보 재학 시절인 1932년 화단에 데뷔한 이쾌대는 1934년 동경제국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에 입학해 1939년에 졸업했고 이후 1941년 일본 동경에서 이중섭(李仲燮), 문학수, 김만형, 최재덕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해 모더니즘 활동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좌익 미술단체에 참여했고, 정치색이 배제된 조선미술문화협회 몸담았다가 한국전쟁 때 인민군 종군화가로 활동 중 포로가 돼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이쾌대의 대표작 '군상Ⅱ'

포로 교환 때 북한을 선택했던 이쾌대는 1960년대 이후 북한 사회주의의 형상화라는 새로운 ‘주체미술’에 동조하지 않은 ‘민족허무주의’라는 명목으로 숙청당했고 이후 자강도 강계시에서 재혼해 살다가 1987년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린 이쾌대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월북화가 작품의 해금 조치로 빛을 보게 됐고 유화의 한국적 수용과 정착이라는 리얼리즘 미술의 정통성이 인정돼 한국 근대미술가 10인에 선정됐다.

김수영 시인

풀의 시인 김수영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 갔던 김수영은 광복 직전 만주에 살기도 했다. 시작(時作)을 할 때 마침표를 찍지 않는 등 한국 현대시의 관습을 만드는 데 큰 영향력 준 시인은 시에 일상어를 접하고 시어에 금기됐었던 욕설과 성(性)을 시도한 최초의 시인이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피난을 떠나지 못해 인민군에 끌려가 강제 징병돼 인민군 의용군으로 전장에 배치된 시인은 1950년 10월 28일 의용군을 탈출했다가 이날 저녁 여섯 시 무렵 서울 동화백화점을 거쳐 해군 본부 앞에서 군국에게 체포돼 이태원 육군형무소, 인천 포로수용소로 옮겨져 다리 부상 치료를 받은 뒤 적십자 군용 병원 열차를 타고 부산 서전병원으로 이송, 같은 해 11월 11일 부산 거제리 미군 제14야전병원으로 옮겨졌다,

김수영 시인의 시비(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의 북한산 국립 공원 내)

1951년 3월에서 6월 사이에 LST를 실려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이후 가슴 통증으로 다시 부산 거제리 야전병원과 충남 온양 국립구호병원에 머물다 1952년 11월 28일 ‘민간인 억류인’ 신분으로 풀려났다.

시인은 석방 이후인 1953년 6월 산문 ‘내가 겪은 포로 생활(해군)과 같은 해 8월 수기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희망)’를 통해 포로수용소 생활에 대한 경험을 남겼다.

시인은 교통사고로 숨지기 전까지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겼고, 이후 1971년 선집 ‘거대한 뿌리’(민음사)가 나온 뒤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소설가 강용준

반공포로 출신 소설가로 불린 강용준

1931년 황해도 안악 태생인 강용준은 1950년 평양사범대학 재학 중에 한국전쟁을 맞아 그 해 7월 인민군 보충병으로 참전했다. 이후 유엔군의 포로가 되어 부산 거제리, 거제도 고현, 광주 사월산 등지에서 3년간 포로 생활을 한 그는 1953년 6월 18일 반공 청년 석방 당시 사월산 수용소에서 철조망을 뚫고 탈출해 전남 함평 등에서 3개월 간 남의 집에 머무르며 밥을 얻어먹다 이후 부산으로 옮겨 부두 노동을 하며 전전하였다.

1954년 공병 소위로 임관한 그는 1960년 7월 ‘사상계’ 제1회 신인문학상에서 그가 경험한 포로수용소 체험을 소설화 한 중편 소설 ‘철조망’이 당선됐고, 이후 1969년 ‘밤으로의 긴 여로’, 1971년 ‘사월산’, 1973년 ‘탈주자들’, 1980년 ‘유월에서 팔월 사이’ 등의 작품으로 인민군 참전과 포로 생활, 수용소 체험 등으로 전쟁의 폭력성과 비참함을 고발하고 전쟁이 가져온 인간 조건의 비극적 숙명을 성찰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

향수의 시인 정지용

지난 2005년 각 언론사들이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시인 정지용(1902-?)이 박창현(朴昌鉉)이라는 가명으로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수감됐다는 증거가 있다고 보도했다.

시인이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북으로 갔다는 증거는 1954년 시사종합월간지 ‘실화"(實話)에 보도된 내용으로 당시 보도에 따르면 시인은 해방공간에 좌파 문학가동맹이 결성한 문인단체의 문화공작대 요원 신분으로 1950년 7월, 낙동강 전투에 강제 투입됐다가 같은 해 8월 왜관 인근 ‘트리오트리’ 전투에서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유엔군에 생포됐다.

그 뒤 지용은 군속 노무자 박창현이라는 가명으로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돼 취사반장생활을 하면서 술과 번민으로 허송세월 했고, 북행이냐 남쪽에 잔류냐의 귀로에서 고뇌하다가 자기가 지은 죗값을 치를 방도가 없다고 판단해 북쪽을 선택했다는 내용이 잡지에 수록돼 있다.

당시 북행을 택한 영문자 포로 명단에는 1933년생 강원도 출신 ‘Pak Chang Hyun"(포로번호 0098017)’이 있다.

특히 정지용 시인은 거제 출신인 유치환 시인과 깊은 우정을 나눴던 사이로 정지용 시인의 거제포로수용소 수감 사실인 입증 된다면 정지용 시인이 유치환 시인에게 ‘모란이 피기까지는’ 및 ‘파초입하(芭蕉立夏)’ 등 2점(청마기념관 소장)의 시화를 건넨 시기가 한국전쟁 이전으로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1949년 유치환 시인은 사등고등공민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했던 이력이 있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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