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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두문동을 아시나요거제의 재발견 = ‘산방산 옥굴(玉窟)’

유난히 전설 많은 산방산엔 고려 망국의 한(恨)을 품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고려 명망 이후 거제에 은둔해 살았고, 사후엔 두문동 서원에 배향된 正隱(정은)인 옥사온(玉斯溫)이다.

그동안 산방산 옥굴은 고려 후기(1271년) 거제현(巨濟縣) 관청과 관리, 관노 등 일부 백성들이 왜구(삼별초 포함)를 피해 진주와 거창 등지로 피난 가 살다가 세종 4년(1422년) 다시 거제로 환도(還島) 하기까지 잠시 행정구역을 옮겼을 때, 혹은 임진왜란의 왜구를 피해 옥 씨 성을 가진 일가가 숨어 살았다는 전설만 있을 뿐 실존 인물이 살았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다 최근까지 의령 옥 씨 중 일부(옥 씨 종친회 마산 - 다음 카페)가 산방산 옥굴의 주인공이 옥사온으로 믿고 참배했던 사실이 알려졌다.

특히 고려 멸망 후 옥사온이 거제에 은거하며 살아온 이야기는 의령 옥 씨 대동보(1999년 발행)와 의령군이 만든 ‘내고장 의령(1985년 발행)’ 인물 편에 자세히 수록돼 있어 그동안 전설로만 내려오던 산방산 옥굴의 실존 인물이라는 점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거제지역에서 옥 씨와 관련된 유일한 지명이 ‘옥굴’인 데다, 거제지역에 숨어 살았다는 기록이 남은 유일한 인물이 옥사온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옥사온은 의령 사람으로 충정왕 3년(1351년) 태어나 태종 13년(1413년) 63세로 세상을 등졌다.

의령 옥 씨 거제파의 시조이기도 한 옥사온은 고려충절의 표상인 정몽주에게 학문을 익혔고, 琴隱(금은) 趙悅(조열)과 冶隱(야은) 吉再(길재)와 친하게 지냈으며, 창왕(昌王) 1년(1389) 기사방(己巳榜) 동진사(同進士) 과거에서 장원급제(1위)해 벼슬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시대 명정승으로 알려진 황희가 이 과거시험에서 4위로 합격했다.

옥사온은 정몽주가 정치적으로 제거당하자 ‘나라의 운이 다 했다’며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거제도에 숨어 살며 호를 해은(海隱)이라 짓고, 옥굴에 숨어 ‘두문불출’했다.

고려에서 성균관 삼품교수관을 거쳐 관종부사 진현제학까지 벼슬을 지냈던 그의 재주를 아까워한 조선 조정은 수차례 불러 벼슬을 권했지만, 끝내 조선의 녹을 먹지 않았다.

이후 거제에서 옛 조상의 땅인 의춘군(宜春君-현재 의령) 정골리 (正骨里)로 돌아가 호를 정은(正隱)이라 하고 죽을 때까지 고려 충신이 아니면 손님을 받지 않고, 매양(동백) 꽃 필 때나 달 밝으면 시국을 상심하는 시(詩)를 지어 부르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산방산 옥굴은 등산객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동굴이다. 등산로를 따라 쉽게 만날 수 있는 삼신굴(부처굴), 무제터(무지개터), 오색토 등과 달리 깎아지는 절벽 중간에 위치해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사람은 찾기 어려워서다.

둔덕면 산방산(507M) 7부 능선에 위치한 이 굴을 찾으려면 산방마을 보현사 등산로를 따라 삼신굴에 도착해 맞은편 절벽(남동방향)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 사이에 가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옥굴에 들어가려면 절벽 위에 올라 로프 등 안전 장비를 채비해 아래로 2M 정도 내려가면 닿을 수 있으며, 내부는 2평 정도로 자연동굴에 안쪽으로는 인위적으로 동굴을 파낸 흔적이 있다.

옥굴 주변(절벽 아래)에는 토기 편과 기와편 등이 자주 발견되는데, 유물의 시기가 통일신라 즘인 것으로 보여 옥 굴과 관련된 유적이라기 보단, 신라시대 산방산 절벽 밑에 아름다운 암자와 미륵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설매암과 관련된 유물로 보인다.

옥사온의 충절은 사후 ‘여지승람’과 ‘두문절의록’에 소개됐고, 현재 두문동서원 72현과 함께(두문동서원 72현 외 64현 항절실 항절반 33인 중 25째) 배향돼 있다.

옥사온의 이야기는 그의 스승인 정몽주와 정몽주의 사제인 정도전과 비슷한 길을 닮았다. 정몽주가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정도전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역사에 남은 것처럼 옥사온은 고려의 충신으로 옥사온의 입조(立朝) 동기인 황희는 고려의 명재상으로 역사에 남았기 때문이다.

최근 고려촌조성사업 용역이 시작된 가운데 마지막까지 고려를 위해 충절을 지킨 옥사온과 옥굴의 이야기도 재조명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문동칠십이인과 두문불출 = 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 또는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은 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전하는 72인의 유신(遺臣)들을 가리킨다. 이들 중에는 두문동에 은거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현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인 두문동(杜門洞)에 들어와 역조(易朝) 즉, 새 왕조 조선에 출사 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며, 또 일설에는 동두문동과 서두문동이 있어서 동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였는데 산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고 한다.

고려말·조선초 당시엔 많은 선비들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은거하면서 나라 안에 여러 곳의 두문동이 남아 있었고 이후 집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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