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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청년, 하루가 인생의 전부다연초면 출신 前 교육부 차관 이기우 인천재능대 총장

인천재능대 이기우 총장은 연초면 다공리에서 태어나 연초초등학교, 연초중학교를 거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 친구 따라 치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9급 서기보로 공무원이 됐다. 주경야독으로 부산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경성대에서 교육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교육부 총무과장, 공보관, 지방교육행정국장, 교육환경개선국장, 교육자치지원국장, 기획관리실장과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국무총리 비서실장(차관급)을 거쳐 교육부 차관을 지냈다.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교육부 차관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공무원’, ‘발치수 320㎜ 교육계 마당발’, ‘이기우가 못하면 정말 못하는 것이다’라는 평가는 공무원의 성공신화를 쓴 그의 이력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는 대학사회 최초로 2006년부터 13년째 인천재능대학교 총장으로 재임 중이며, 136개 전문대학을 대표하는 협의체인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최초로 4번째(제14~15대, 제17~18대) 회장을 지내고 있다. 새거제신문과 인터뷰를 한 지난 22일에도 우즈베키스탄 부총리 등 정부 요인들의 극진한 환대 속에 친선 교류를 마치고 귀국, 고향 거제를 찾은 날이었다.

- 어린 시절은 어떠셨는지?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나와 살았지만, 태를 묻은 고향 거제도에서의 유년시절은 뚜렷이 기억납니다. 특히,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배가 고팠던 기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어렵지 않은 집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지만, 저희 집은 유독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쌀밥을 원 없이 먹어 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제삿날이었습니다. 제삿날에는 그래도 쌀밥과 기름진 음식이 제사상에 올라가고 생선에 전이라도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늘 어느 집에 제사가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웠고, “느그 집 기제가 언제드노?”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힘이 장사셨고, 애주가로 술 좋아하는 친구 분들과 흥겹게 자주 어울리셨지만 자식들에게는 애정 어린 표현을 하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유일하게 제게 해주신 음식이 하나 있는데, 결핵성 늑막염으로 거제도 집에 내려와 쉬고 있을 때 결핵에는 개가 좋다고 황구 한 마리를 사가지고 오셔서 한약재를 넣어 푹 고아 주셨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개소주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어렸을 때는 병약했던 제가 지금은 어디가도 체력만큼은 자신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 학창시절에 대해 한 말씀.

“저의 학창시절은 희망보다는 좌절이 많았습니다. 거제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나마 공부는 잘 한 덕분에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심각한 병인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1년을 휴학한 뒤, 다시 2학년으로 복학했지만 공부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네 집 다락방에 기거하며 혼자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대학 준비는커녕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졸업을 맞아 남들이 다 대학을 간다니까 엉겁결에 원서나 써보자는 마음으로 꼭 어느 대학 가겠다는 목표도 없이 시험을 치렀습니다. 물론 대입에 실패했습니다. 돈을 모아서 입시 준비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공무원을 준비하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 시험을 봤다가 덜컥 합격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고달팠던 학창시절과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부산 대연동 우체국에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갔지요. 이후 교육부 공무원 시험을 다시 쳐서 시작된 공직이 거제교육청, 경상남도 교육청을 거쳐 문교부 서무계장으로까지 승진, 발탁이 되었습니다. 참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하는 재미에 빠져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던 때, 문교부 정희재 차관을 만났습니다. 그 분의 격려로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 공부하면서 현재의 안양대학교(당시 대한신학대학교), 부산대학교 석사, 경성대학교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잊었던 꿈,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신 참 고마우신 분입니다.”

- 좌우명이나 삶의 철학은?

“제가 등불로 삼는 좌우명이 몇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하루가 인생의 전부다’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를 방해하는 ‘과거의 나’는 철저히 죽이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도 주인인 내가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삶, 내게 주어진 기회에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겐 언제나 오늘 하루가 가장 소중합니다. ‘하루살이’라고 할까요. 오늘 이 하루를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루를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은 쉽지만 실천이 어렵습니다. 매일 결심을 새롭게 다져야하고, 자신을 성찰해야 하며, 특히나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해야 이렇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조직생활을 하면서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하루를 열심히 산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성과가 예상처럼 나오지 않았을 경우, 예전의 나를 빨리 정리하는 방법에도 있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예전의 나를 철저히 죽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자신을 이끌어준 원동력은 무엇인가?

“‘스스로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니 채워가며 살겠다’라는 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늘 무엇인가 배우려는 자세로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연령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며 익히려 노력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을 때도 그것을 끝이라 여기지 않았는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저에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졸 출신인데 행정고시 출신이 가득한 공무원 조직에서 어려운 점 없었느냐고. 아마도 이 질문에는 학력이 낮으면 그만큼 능력이 없지 않느냐는 의문과 학력 때문에 차별이 있지는 않았겠느냐 하는 점이 담겨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공무원으로 살면서 한 번도 제가 가고 싶어서 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먼저 있었고, 그 사람들이 저를 데려다 쓰려고 한 결과 제 자리가 만들어 졌습니다. 또 그 자리에 가면 저는 늘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시출신보다 승진이 오히려 빨랐고, 이해찬 국무총리로부터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공무원’이라는 닉네임도 얻게 됐습니다. 성실한 자는 준비된 자이고, 준비된 자는 믿음을 얻는다는데, 그 믿음이 쌓여서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 교육부 차관까지 오른 비결이 있다면?

“대학 입시시험에서 떨어진 후 부산 대연동우체국 서기보로 들어갔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우연찮게 공직에 입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어 다시 시험을 쳐 거제교육청 서기보로 옮겼습니다. 처음 거제교육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도 ‘빨리 돈 벌어서 대학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일은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일을 제대로 배우고 또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출근을 했더니 제 자리가 없는 겁니다. 그때 제 상사가 제 책상을 밖으로 치우고 시설계로 보냈습니다. 3개월 동안 먹지로 글을 베끼는 작업만 시키는데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기왕에 할 일이라면 제대로 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자’라는 결심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무계로 원위치 되었지요. 이후 대학입시에 대한 생각을 접었습니다. 아니, 생각이 안 났다는 것이 정답이겠네요. 왜냐하면 일하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승진점수도 좋았고, 사무관 승진시험도 단번에 붙었습니다. 이후 공무원으로서 제대로 일하는 공직자가 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이왕 하는 일이라면 신명나게 그리고 잘 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자잘한 일이더라도 정성을 들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육부 차관까지 역임하고 ‘공무원의 신화’라는 과분한 평가까지 받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직에 임했나?

“‘좋은 것은 당신이 직접 보고하고, 나쁜 것은 내가 보고 하겠다’, 국무총리 비서실장 시절 후배 동료들에게 한 말입니다. 저는 남들이 힘들어 하고 하기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는 편입니다. 절실함 속에서 많은 것을 겪으면서 궂은일에 단련이 됐기 때문에 크게 힘들다고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아랫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업무를 더 잘 해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며, 저 스스로는 제가 맡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육부에 있을 때는 재직자들의 이름을 전부 외웠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위해서였지요. 상대는 제 이름을 몰라도 저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만나는 사람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에게는 성심을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인맥이 쌓이더군요. 그런 저를 보고 김범일 대구시장이 마당발이라 하여 ‘발치수 320㎜’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인천재능대학교 총장으로 막 부임해서도 학과별로 돌아가며 교원들과 오찬간담회 겸 상견례를 하던 날, 악수를 하며 일일이 그분들의 이름을 불러드린 적이 있습니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라고 노래한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사람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고자 성심을 다했습니다.”

- 공직자상은 어때야 하나?

“공직자는 나라와 국민을 위한 봉사자입니다. 그만큼 보람이 있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눈 돌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승급은 당연히 따라오는 부상 같은 것이지요.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한눈 팔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 차관직 사임 후 어떻게 인천재능대를 선택했나?

“교육부 차관을 마무리할 당시 공직생활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지만, 온 정성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습니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늘 다짐하고 있었던 터라, 교육부를 떠나는 데서 오는 금단현상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인생 제2막도 교육부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한 덕분에 교육계를 떠나 찾을 수는 없었고, 제 깜냥도 교육계 안에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4년제 대학에서 총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에헴 총장’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 인천의 한구석에 위치한 작은 대학의 총장(당시에는 학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때 저를 아는 모든 지인들은 의아해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제가 인천재능대학을 선택했던 이유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답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자리의 크고 적음에 연연해하지는 않고 다만 일을 제대로 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제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고, 또 제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는 말이지요. 당시 인천재능대학은 수도권에 위치해 있지만 인지도와 평판, 공식적으로 집계되는 대학역량 평가 지표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소위 ‘그만그만한 전문대학’이었습니다. 그런 면이 제 의욕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또 한국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대학과 직업교육이 정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과도 부합했습니다.”

- 교육 관련 소신은 무엇인가?

“‘교육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늘 주저하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바로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에 관한 변하지 않는 생각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제시한 ‘실사구시(實事求是)’입니다. 실용 우선, 합리 지향, 실상 파악, 쓸모를 강조했던 실사구시가 바로 교육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교육이 일정 부분 정체되고 또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은 현실(사실)과의 간극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사실을 추구하고 실용을 지향하는 힘이 너무 약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교육은 삶의 문제에서 출발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매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써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써먹을 수 없는 교육은 생명력이 길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교육은 실사구시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교육이 다시 희망이 될 수 있는 혹은 100년지계를 도모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천재능대학이 명품대학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정부재정지원사업 9관왕 대학, 전국 취업률 1위 대학(수도권 5년 연속 1위), 벤치마킹 가장 많이 하는 대학, 송도국제화도시에 최초로 뿌리내린 전문대학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오지만, 13년 전 제가 취임할 때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허약한 자신감을 깨워 마음을 모으고 변화와 혁신의 과제를 도출하여 작은 성공을 모아나갔습니다. 늘 처음이 가장 힘든 법 아닙니까. 넘어온 작은 허들이 더 큰 관문을 통과하는 디딤돌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구성원의 자신감과 역량이 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변화와 개혁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과 우리대학 구성원의 헌신적인 노력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 이 시대 아픈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희망찬 내일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청춘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서 일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훨씬 더 가치 있게 평가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워렌 버핏은 “이 세상에 성공적인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은 없다. 성공적인 직업인과 그렇지 못한 직업인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미래사회를 주도할 키워드는 학벌이나 학력이 아닌 능력입니다. 아울러 인생 이모작시대에는 자신이 신명을 다해 지속적으로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여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꾸준히 축적해 자신만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즉, ‘극적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엇을 가장 즐겁게 잘 할 수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이를 평생의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현재 거제가 많이 어렵다.

“조선경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만큼 대한민국을 세 번 구한 거제의 저력을 믿었으면 합니다. 관광업도 더욱 발전됐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업과 관광업 쌍두마차로 더욱 풍요롭고 안정적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만 그동안 거제는 조선산업에 의존하다보니 거제를 ‘특정화’하는데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거제만의 치열한 그 무엇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특정화’란 지역현안이 곧 국가 경쟁력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향을 의미합니다. 이제 출향인들과 거제인들이 주도적으로 거제를 특정화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때입니다. ”

전의승 기자  zes20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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