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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구우목(盲龜遇木)의 희유함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한번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대양을 헤엄치고 다니던 거북이가 숨을 한번 들이쉬기 위해 물 바깥으로 목을 내밀었을 때 불가사의하게도 바다를 떠다니던 한 개의 나무판자 옹이구멍 속으로 그 목이 정확하게 들어가 걸리는 것처럼 희유한 일인 것이다.

아니면 지상으로부터 수억만 제곱에 또 수억만 킬로미터보다도 더 높은 장수천에서 한 개의 바늘을 던졌을 때 그 바늘이 너무나 우연하게도 지상의 겨자씨 하나에 정확히 꽂히는 것만큼이나 희유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첫째는 부처님은 광겁에 한번 만나기 어려운 분이라고 하셨다. 천만다행히도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긴 했어도 부처님 가신지 벌써 이천오백년 이나 흘러가 버렸다.

그렇게 오래되다 보니 그 원초적 말씀(경전)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그 종지(宗旨) 또한 나날이 퇴색되어 사라지고 없는 형국이 되다 시피 했다.

오늘날 그 예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부처 찾는다고 경전의 말씀과는 반대로 성지순례, 백팔 삼사순례라 하여 해외 및 국내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돌아다니고 있고, 또 물고기 방생한다고 강과 바다로 쫓아다니고 있다.

제발 이제는 그러한 것을 멈추어야 한다. 부처님 제자답게 해외로 돌아다닐 그 엄청난 돈으로 지금도 병원에서 수술비가 없어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곳에 써야 하고, 돌아다닐 그 긴 시간 동안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를 찾아서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다지며,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어린아이한테 물어보라! 막대한 돈 써 가며 물고기를 살려야 하는지? 인간을 살려야 하는지? ...... 제발 아이가 웃을 일이다.

그렇게 한번 그 분을 친히 뵙게 되면 그 크나큰 음덕을 입게 되어 모질고 질긴 윤회의 계박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을텐데......

복덕이 살얼음처럼 얕고, 새털처럼 가벼운 죄 많은 우리들이다 보니 꼭 인간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부처님 오시기 전이나 그 분 가시고 난 한참 뒤에야 그 분을 간접적으로 만나고 있은 운명에 그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정말 복 많은 인간인가? 미륵보살이 부처가 되어 이 땅에 오시기까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임기가 아직도 약 오십육억년이나 남았으므로 지금 이후로 태어나는 인간들은 나보다도 더 못한 말세의 퇴색되어 버린 불교를 만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사바세계에 오셨다는 것이다. 광막한 우주에는 지구 덩어리를 부수어 먼지가루를 낸 그 숫자보다도 몇 억 배나 더 많은 행성들이 공간적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도 그 분은 우리가 있는 이 사바세계에 오셨던 것이다.

우주의 삼천대천세계, 그 어느 세계인들 고통 받는 중생들이 왜 없겠는가마는 그래도 그 분은 이 척박한 사바세계에 감임함으로 해서 비록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비통함은 있으나 그래도 우리는 그 분의 성스러운 명호 정도는 힘들이지 않고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희유한 일인가? 거기다가 나는 북방 끝이나 남단 끈의 섬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벙어리와 소경, 그리고 귀머거리로 태어나지 않았으니 이 또한 얼마나 큰 다행인가?

만약에 전생에 이 정도의 복이라도 지어놓지 않았더라면 어째 될 뻔 했겠는가? 가슴이 떨리는 일이다.

셋째는 복덕과 지혜를 완벽하게 구비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 분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증득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분으로 하여금 인간의 한계점을 간접적으로 나마 확실히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중생들이 잠재시키고 있는 힘의 능력은 허공을 부수고 바람을 낚아챌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굉장한데도 우리는 늘 힘없고 항상 비천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이 기막힌 운명은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중생들 모두가 다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자기 발목을 스스로 옭아매었던 거서이다. 그리고는 이제 자유를 부르짖고 있다.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서로들 아우성이다. 스트레스를 받아 죽을 것 같다면서 가슴을 치며 절규하고 있다. 그렇지만 늦게라도 진정한 자유를 찾아 그 분의 옷자락이라도 잡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넷째는 대자대비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시다는 것이다.

자칭 성자들이 이 땅에 한번씩 나타날 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살상국이 일어나곤 했다. 그들은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서 성자가 되어갔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긴장과 불안이 뒤따라 다녔다. 그 후예들은 그 교리를 전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전리품을 가질 때마다 그들은 그들의 절대 신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어 고맙다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었다.

그러나 불교는 역사이래로 단 한 번도 전쟁과 살육을 자행한 일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부처님을 위해 힘없는 사람을 잡아와 노예로 전락시키거나 그들의 소중한 보물들을 빼앗아 와 부처님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을 탈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어 감사하다고 그 분의 권능을 탄탄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 분이 내리시는 절대 자비는 은연중에 그 분을 따르는 일체중생들의 삭막한 가슴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힘없는 수많은 중생들이 그들대로의 안락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던 거서이다.

보살행오십연십경(菩薩行五十然心經)에서는 “보살은 세세에 무기를 만드는 일이 없다. 중생들로 하여금 서로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고 하신 말씀만 보아도 그 분의 자비가 얼마나 깊고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그 거룩하고 가없는 자비의 은혜, 목숨이 수 만 개가 되더라도 그 숭고하신 자비의 은혜에 일백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을건가? 그저 고개가 숙여지고 저절로 무릎이 끊어질 뿐이다.

입이 있는 자는 그 분의 자비를 찬탄하여야 할 것이다. 손, 발이 있는 자는 그 분의 위대함을 받들어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떠한가? 절에 와서 엎드리기만 하면 손 내밀고, 입으로는 뭐 달라, 뭐하게 해 달라, 무지막지하게 요구만 하고 있다. 그저 한심할 뿐이다.

이토록 거룩한 부처님의 공덕을 망각하고 사사로운 편견과 사견으로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논쟁하기를 좋아한다면 그들은 부처가 이 땅에 줄을 이어 출생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전혀 이익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는 “논쟁하는 일에는 늘 불화와 과실이 따르지마는 그렇지 않을 때에는 항상 화평의 공덕이 구비되어 진다.” 라고 하시면서 허망한 논쟁으로 아까운 시간을 탕진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명심해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늘 망령스런 논쟁과 정법보다는 삼재, 사주, 철학 등의 사법을 즐기며, 또 그보다 못한 자들은 그 논쟁을 듣고 또 다른 논쟁을 다른 곳에서 다시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 막소주 술집이 고급 술집 보다 그렇게 시끄럽고 그 가운데 시비와 논쟁이 자주 벌어지는 가를 새겨볼 일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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