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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재발견 = 거제의 효자 ③효자장사랑전주이공돌대유적비

지난 2006년 1월 연초면 효촌마을 입구에는 조선시대 거제지역에서 이름난 한 효자의 비석 제막식이 열렸다.

효자장사랑전주이공돌대유적비(孝子將仕郞全州李公乭大遺蹟碑)다. 이 비석은 조선 숙종 때 하청면 사환리에 처음 세워져 순조 5년(1805년)에 봉산재(송정고개)로 옮겼고, 1991년 7월에는 국도 확장공사로 인해 옥포 어린이 놀이터로 이전했다.

그러다 2001년 8월부터 효촌마을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추진돼 2006년 제막식을 열고 지금의 자리에 세워지게 됐다.

우리나라에 ‘효촌마을’로 불리는 지명 37곳 중 마을의 이력이 기록(조선왕조실록)과 함께하는 예는 드믄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구전된 이야기에서 비롯된 탓인데 거제의 효자 이돌대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소금을 구워 팔던 거제 효자 이야기

이돌대는 조선 중종 때 사람으로 그의 깊은 효심은 경상도 안찰사가 임금에게 보고할 정도로 그 효심이 지극했다.

중종 12년(1517년) 10월 6일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올린 장계(狀啓)는 다음과 같다.

(중종실록 제30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안국(金安國)이 장계(狀啓)했다.

“거제(巨濟)의 *염한(鹽漢) 이돌대(李乭大)는 일곱 살에 아비를 잃었는데, 지극한 효성으로 어미를 봉양하여, 달마다 세 번 음식을 풍성히 장만하고 잔치를 베풀어 어미에게 바쳤다.

어미가 죽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되 조석의 제전(祭奠)을 아주 깨끗이 하는데 힘썼으며, 가난해 어머니의 묘에 제사음식을 바치는 일을 계속할 수 없으면 때로는 빌어다가 제사하는 등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고,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되 남보다 특이하게 하고 돌을 가져다 담을 쌓되 높이 석 자나 되게 했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서는 어미의 무덤 곁에 아비를 옮겨 묻고서, 명일(名日)과 기일(忌日)에 지성으로 제사하고, 매월 그믐날에 무덤에서 별제(別祭)하되, 제사 때마다 반드시 하루 전에 무덤 있는 곳에 올라가 *치재(致齋) 하고 *쇄소(灑掃)하고 잡초를 제거했다”

이후 이돌대의 효심은 150여 년이 지난 숙종(1674년~1720년)에서야 역사기록에 따라 하청면 사환리에 *정려문(旌閭門)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세월과 비바람을 맞은 비석이 훼손되자 후손이 살고 있었던 지금의 효촌마을에 효자문을 세우고 이때부터 마을을 ‘효자문(孝子門)’마을이라 부르게 했다. 또 조정은 이돌대에게 장사랑(將仕郞)이라는 관직을 추증(追贈)했다. 지금도 연초지역에선 효촌을 ‘효자문 마을’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가난했지만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조선 최고였던 이돌대의 지극한 효성은 50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염한(鹽漢) : 조선 시대,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던 사람을 이르던 말. 신분은 양인(良人)에 속하면서도 천역(賤役)을 맡았던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계층.

*치재(致齋) : 제사 전에는 심신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 한 일을 멀리하는데 이것을 재계(齋戒)라 한다. 며칠 동안의 재계 중에서, 처음 수일 동안은 애문(哀問)을 삼가고 음악을 듣지 않고 흉한 일을 대하지 않는 등 근신하는데 이것을 산재(散齋)라 하고, 그 뒤 바로 제사 전까지는 제사 외의 모든 일을 생각하거나 간여하지 않고 오로지 제사에 관한 일만을 하면서 재계하는데 이것을 치재라 한다.

*쇄소(灑掃) : 물을 뿌리고 비로 쓰는 일

*정려문(旌閭門) :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려기(旌閭記)를 게시한 문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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