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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록 아름다운 지극한 효성거제의 재발견- 남부면 명사마을 쌍효문(雙孝門)

거제의 재발견 효자∙열녀 열전①

거제의 재발견 ‘효자·열녀 열전’은 거제지역에 남아 있는 효자와 열녀에 대한 이야기로 거제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효자와 열녀의 이야기다.

비석과 설화 속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는 거제지역의 전통문화의 얼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순서와 상관없이 차차 보도할 계획이다.

은모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남부면 명사마을에서 저구마을로 가는 옛길에는 쌍효문(雙孝門)이 있다.

쌍효문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 나라에서 지정해 세운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지역에 정문을 세워 표창)로 전통문화의 얼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특히 이런 정려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전쟁 중에 삼강의 행실이 뛰어난 효자·충신·열녀의 사례가 많고 타 지자체의 경우 ‘쌍효문’을 도지정문화재에 등록한 경우도 꽤 많다.

남부면 명사마을 쌍효문은 효심으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 죽은 양 씨 집안의 효자와 남편 사후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그의 처가 만들어낸 슬프고 아름다운 지극한 효심에 얽힌 이야기다.

남부면 쌍효문(雙孝門)과 쌍효록(雙孝錄)

러시아 발틱함대가 대마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던 1905년 5월, 남부면(당시 동부면) 명사마을 앞바다에 해적(왜구) 무리가 배 7척을 이끌고 침입했다.

해적들은 마을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박해 온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 사람들은 해적의 횡포를 막을 길이 없어 동동 구르고 있을 즈음 마을 촌장이었던 양재현(梁在現) 씨가 해적 앞을 막아섰다.

양 씨는 본래 명사마을을 이끌어온 사람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늘 솔선수범하는 모습으로 마을 사람들이 존경하는 덕망 있는 인물이었다.

그날도 양 씨는 마을 사람들이 해적에게 피해를 입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홀로 해적 앞에 서서 그들을 좋은 말로 타일렀다.

그러자 해적 무리 중 하나가 칼을 빼들고 양 씨를 찌르려고 덤벼들었고 옆에 있던 양 씨의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대신해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해적 무리가 훔친 양식과 재물을 배에 실어 도망가던 중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의 심판이었는지 왜적들이 바다로 도망하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배가 순식간에 뒤집혀 도적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몰살된 것이다.

당시 양 씨의 아들인 양현종(梁瀚鍾 1875~1905) 씨의 나이는 31세로 그의 부인 윤 씨의 뱃속에는 9개월 된 아들이 있다.

과부가 된 윤 씨는 처음엔 세상을 떠난 남편을 따라 자결하려 했으나, 어린 4남매와 복중에 아이, 그리고 나이 많은 시아버지를 걱정해 생각을 달리했고 이후 어린 자녀들과 시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피다 1945년 유명을 다했다. 특히 당시 복중에 있던 양현종의 아들 영복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효심을 이어받아 할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해 지역에서 이름난 효자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목숨을 바쳐 아버지를 구한 양한종의 효행과, 그의 부인 칠원(漆原) 윤 씨(尹氏)가 시부모를 공경하며 모신 효성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영복(泳福) 영희(泳禧) 영상(泳翔) 3형제가 기미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3월, 나라의 도움으로 쌍효기실비(雙孝紀實碑)를 세운 것이 남부면 명사마을의 쌍효문이다.

이듬해인 1920년 경신년(庚申年)에는 거제지역 유림은 물론 경상도·제주도·전라도의 유림들이 세상에 본보기가 됨을 기념하는 쌍효비를 칭송한 글들을 모아 쌍효록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양 씨 문중에 보관돼 오고 있다.

고영화 고전연구가에 따르면 쌍효록에는 모두 175명이 참여해 177편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시편(詩篇)을 남긴 작가는 현(現) 거제지역 거주자가 129명, 한산면 14명, 통영 12명, 그 외 전라도(14명)와 경남·제주도 일대 작가들이 참여한 지역에 유래 없는 역사였다.

지금도 남부면 명사마을에는 양희운 씨(60)를 비롯한 6가구 20여 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지금도 남부면 명사마을에는 양희운 씨(60ㆍ사진)를 비롯한 6가구 20여 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명사초등학교 입구에는 명사 마을 사람들이 1923년(계해년 봄)에 세운 양한종의 아버지인 양재현 공의 시덕비(梁公在現 施德碑 癸亥春 里民 竪)를 세워 지금까지 남아 있다.

강희석 명사마을 이장(68)은 “양 씨 집안은 예부터 명사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던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면서 “큰 비석(쌍효기실비)의 경우 한산도에서 만들어져 명사로 옮기면서 바다에 빠진 것을 마을 사람들이 건져냈고, 양재현 씨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작은 비석도 ‘사라호 태풍(959년 9월 11일)’때 바다로 떠내려가던 것을 마을 사람들이 건진 일화가 있다”고 말했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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