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뉴스
무신정변 원인, ‘의종’ 아닌 고려사회제도가 통설본지, 지역 고려사 문제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에 답변 받아


고려사 및 의종실록 사료비판 과정 거쳐 이해하고 사용돼야

교과서 등에 소개된 의종의 평가 대부분은 현재 사학계의 주장 및 통설과 많이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는 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역사의 흔적 및 고려촌 조성 사업의 핵심 콘텐츠인 ‘무신정변과 의종’에 대한 지역주민 간의 의견 대립을 완화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에 질의해 답변을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답변에 앞서 <사료의 수집·편찬 및 한국사의 보급 등에 관한 법률>과 <동 시행령>에 따라 운영되며, 역사적 사안의 진위나 가부를 판정하지 않고, 질문에 대한 답변은 상기 법령이 정한 업무의 범위 안에서 설명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 최근 우리나라 사학계가 바라보는 무신정변 및 의종 관련 해석은?

편찬위 : 무신정변의 원인을 ‘의종의 실정’에 두는 입장은 주로 근대 이전의 전통사학에서 제기되었던 연구경향이며, 근대 역사학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1930년대 이후로는 고려의 전통적인 문신우대 정책에 수반되는 무반에 대한 차별을 ‘무신정변’의 원인으로 주목한 해석이 통설이다.

이후 학계에서는 전시과 등을 둘러싼 일반 군인들의 불만과 같은 경제적인 요인, 무신들이 전쟁과 같은 상황을 통해 꾸준히 자신들의 현실적인 지위를 향상시켜 왔던 것이 결국 ‘숭문억무(崇文抑武)’ 정책과 충돌하게 되었다는 사회제도적인 요인 등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고 있다.

- 무신정권이 기록한 고려사 및 ‘의종 기록’을 올바른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나?

편찬위 :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사료(史料)의 경우 작성된 그대로가 아닌 사료비판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역사연구에 사용될 수 있다.

사료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 반드시 진실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기록되어 남아 있는 사료는 각자의 입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단편적이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입장에서 기술하였는가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기록된 내용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내용 속에는 거짓이나 오류도 있을 수 있어 역사학자는 사료비판 과정에서 이러한 모든 경우를 고려하면서 해당 사료와 다른 기록과의 선후 관계, 불합리한 점 등을 비교 검토하여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해야 한다.

-경계의 난 시기 송과 금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 국왕은 누구인가?

편찬위 : 12세기 대외 관계에서 고려는 형식적으로는 사대 관계를 수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수준에서 국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며, 고려의 국왕은 ‘해동의 천자’로 인식되었고, 군주의 위호, 관제, 국가의례 등에서 황제국으로 체계를 유지한 이른바 ‘외왕내제(外王內帝)’의 체제였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만 송과 금의 역사기록엔 당시 고려 명종의 즉위를 곧바로 인정하기 보다는 당시 고려사회의 내정을 먼저 살피려는 기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료 및 출토 유물에 따른 상정예문 편찬 및 상감청자 제작 시기는?

편찬위 : 상정예문 편찬 및 상감청자 제작시기를 지금의 시점에서 정확한 기술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어 판단하기 힘들지만, 상정예문의 경우 고려사 > 권72 > 지 권제26 > 여복1(輿服 一) > 여복 서문에 “의종(毅宗)때 평장사(平章事) 최윤의(崔允儀)가 조종(祖宗)의 헌장(憲章)을 모으고 당제(唐制)를 많이 참고하여 고금례(古今禮)를 상정(詳定)하니, 위로는 왕의 면복(冕服), 여로(輿輅)에서 의위(儀衛), 노부(鹵簿)에 이르렀으며, 아래로는 백관의 관복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일대(一代)의 제도가 구비되게 됐다”는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상감청자의 경우 의종 13년에 죽은 문공유의 묘에서 나온 국보 155호 '청자상감 보상당초무늬 다완'이 가장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맞지만, 정확한 제작시기를 알 수 없는데다 이를 뒷받침 할 사료 등이 부족해 앞으로 학술연구 등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다.

-의종 24년 기록된 ‘귀양’ 및 ‘폐위’ 기록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편찬위 : ‘고려사’ 세가 권19, 의종 24년 9월’의 기사 “왕이 거제현으로 쫒겨가고 태자는 진도현으로 추방되다(己卯 王單騎, 遜于巨濟縣, 放太子于珍島縣)”에서 ‘손(遜)’자가 ‘쫓겨나다’라는 의미로 인용 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한자 본래의 뜻인 겸손하다, 순하다, 사양하다, 양위하다, 못하다 등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온라인으로 서비스하고 있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쫓겨나다’로 해석한 것은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9월 기사’ 등에 기록된 ‘방(放)’등의 의미를 참고해 해석한 것 같다.

덧붙여 편찬위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고려사’부분은 고대사나 조선사에 비해 연구가 적은 편이어서 부족한 부분이나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많다”며 “앞으로 고려사에 대한 다양한 학술대회나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대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4
전체보기
  • 황제 양위! 강제로 양위가 진실 2018-12-06 16:33:58

    의종을 나쁜 왕으로 폐위된 왕으로 부르는것은 역사왜곡이며 일제시대의 교육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고려부흥운동이 일어난다면 거제가 고려의 실질적 수도이다! 그래! 공부좀 해라 새거제신문 기사에 보면 알 수 있다 피왕성에는 의종이 세운 멱복사라는 절이 있다 ! 애민정신을 가진 왕이다 ! 의종을 따라온 신하들은 불사이군 했고 후대에는 반부라는 명신을 배출 했다!! 고려청자 상감예문 의종의 치적이고 명군이며 성군이 틀림 없다 식민사학에 찌든 자들아! 이시대에 의종복권 하는게 거제의 역사적 사명이다!   삭제

    • 공부합시다 2018-12-06 13:57:29

      총독부의 통치
      1910년대 = 무력통치, 1920년대 = 문화통치, 1930년대 일선동조론 안배움? 의종이 방탕해서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대목만 배움?
      실제 대한제국시기 교과서엔 의종이 나오지도 않음, 그리고 일제, 미군정기 지나고 1954년부터 시작된 제1차교육과정 때도 의종 비판적이지 않은 교과서가 1962년부터 제5차교육과정 까지 일제와 똑같음. 최근 점점 무신정변의 원인이 의종에서 사회적제도 등으로 풀이, 공부 한든 아니면 요즘 나오는 고려사 관련 책을 좀 읽든 것도 아님 검색을 좀 해보지 쯧쯧   삭제

      • 아다다 2018-11-18 21:01:41

        총독부가 만든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재’부터 시작된 왜곡된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며... 어랏1930년대면 일제 강점기 아닌가??어째서 일제 강점기의 사관을 믿을 수 있을까나??의종의 부정적 이미지를 일제치하에서 벗어나게 해준걸보니...의종을 띄어준 이유가 있는게 있는거시 분명하다! 저의 사견임을 밝혀둡니다. 나는 일제 강점기든 병자호란이던 원 간섭기이던 맞는 소리하면 믿는데 일제 연관된거처럼 해서 상대를 몰지각하게 모는 약은 수를 부리는 치들이 보여서 한번 되돌려 줘 봤음 국편위는 공명정대 하구만!   삭제

        • 고려사만 믿고 갑니다! 2018-11-16 19:53:37

          의종의 둔덕!! 깊은 애민 정신을 가졌던 의종이 분명하다! 둔덕으로 피난온 의종 덕에 당시의 남방의 문화적 수도는 거제 둔덕이다 둔덕이 고려의 실질적 수도다! 고려의 실질적인 최후의 황제는 의종이다!

          밴드에서 이러던데 이것도 알아봐 주세요 ㅎ 난 학자가 아니라서 저 말들이 진짜인지 모루겠쏘요   삭제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