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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고을 암행어사 출도야거제 백성이 기억해야 할 암행어사 조기겸

조선의 ‘007’ 암행어사

조선의 독특한 감찰 제도였던 암행어사는 조선 초기부터 분대어사·행대·찰방·문민질고경차관 등 중앙에서 파견하는 임시 감찰관에서 16세기에 들어서 제도화된 우리나라 특유의 제도다.

1509년(중종 4) 11월 암행어사 기록을 시작으로 성종 말기 즈음에는 암행어사 제도가 공식적으로 활용됐고, 조선 후기에는 암행어사의 활동이 왕성해져 숙종과 정조 때를 거치면서 임명방식·임무규정·운영방안 등이 체계적으로 정비돼 이후부터는 ‘어사’라고 하면 으레 암행어사를 뜻할 정도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시대 수많은 암행어사들은 지방 수령, 방백들의 부정행위를 적발하고 방지하는 역할을 해오다가 고종 29년(1892) 전라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이면상((李冕相)’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암행어사는 보통 당하관(堂下官)으로 젊은 시종신(侍從臣:대간·언관·청요직 등을 말함) 중에서 뽑았는데, 왕이 직접 임명하거나 의정부에서 왕의 명령을 받고 후보자를 선정해 천거하면 왕이 그중에서 선정했다.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에서 어사의 임무를 일괄로 규정했는데, 이를〈암행어사재거사목 暗行御史齎去事目>이라고 한다.

사목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규정한 책이고, 마패는 역마(驛馬)와 역졸(驛卒)을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이다. 원래 마패는 지방으로 파견되는 관리를 위해 만들었지만,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암행어사의 특성상 역마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 어사의 신분증 역할과 창고를 봉인할 때는 어사의 도장(印)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원래 마패의 발급은 병조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비밀유지를 위해 암행어사의 마패는 병조를 통해 정식 발급 절차를 밟지 않고 승정원에서 보관했다가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고 1마패에서 5마패까지 있는데, 암행어사에게는 보통 2마패가 지급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암행어사의 이미지는 박문수나,〈춘향전>에서 남원 수령인 변학도를 처벌하고 사랑을 구하는 이몽룡이 대표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된 박문수는 조선왕조실록에 박문수는 별견어사로 임명된 예는 있지만 암행어사에 임명된 적이 없었다.

박문수의 암행어사 이미지는 역사가 아닌 설화를 통해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따르면 전국에 ‘암행어사 박문수’ 이야기가 210여 개가 넘는다.

이 중 거제지역에도 3편 기록돼 있다. 하지만 거제지역에 기록된 박문수 설화는 대부분 다른 지역의 설화와 비슷하고 거제와 연관된 지명도 없다.

박문수는 1727년 영남안집어사(嶺南安集御史), 1731년 영남감진어사(嶺南監賑御史), 1741년 북도진휼사(北道賑恤使),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關東嶺南均稅使) 등 모두 4차례 별견어사로 파견됐다.

하지만 박문수가 거제와 꼭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다. 흉년에 기민 구제 등 진휼을 감독하기 위한 임무와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고 세금을 정하는 법을 마련하기 위해 어사로 파견된 박문수의 보고서엔 거제지역의 구휼 및 양역의 폐단에 대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거제의 암행어사 조기겸

박문수처럼 ‘임하필기(林下筆記)나 ‘청구야담(靑邱野談)’ 등 18~19세기 및 조선 말기 야담집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거제에는 몸소 거제 땅을 둘러보며 백성의 수고로움을 마음에 담았던 암행어사가 있었다.

자는 치수(稚秀), 계축(癸丑) 1793년(정조 17)에 태어나 순조 22년(1822년) 성균관 유생으로 초시에 합격해 37세 당상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이른바 ‘승진 꽃길’을 이어간 ‘거제의 암행어사’ 조기겸이다.

조기겸의 암행어사 행적은 기성관에 있는 철비와 경남 산청에 있는 석비로 된 송덕비에 고스란히 남았다.

철비에는 ‘암행어사 조공기겸 영세불망비(暗行御史趙公基謙永世不忘碑)’ 조기겸(趙基謙, 1793년~?),임천(林川) 조씨, 호조참의 역임, 부(父)는 조학빈(趙學彬)' 생부(生父)는 조학춘(趙學春)으로 자는 치수(稚秀)이다. 후면에는 ‘1879년 11월에 읍민이 세웠다(崇楨後五己卯十一月邑民立 · 높이 161cm, 너비 42.5cm 鐵碑)고 새겼다.

1822년 6월 25일 29살 나이에 돈녕부(敦寧府) 종 9품으로 시작한 조기겸은 1827년 증광시(增廣試-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식년시 이외에 실시된 임시 과거) 병과(丙科)에 급제 해 종 5품에 오르는데 5년이 걸리는 등 벼슬길에 올라 당상관인 정삼품 호조참의에 오르기까지 모두 8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벼슬 중 조기겸의 특별한 이력은 1828년 2월 정오품 문학에 봉해지면서 조정 요직에 오르고 청나라 사신(서장관)으로 중국의 신문물을 경험한 것이다.

서장관은 조선시대 부경사행 3 사신 가운데 한 사행직으로 중국에 보내던 부경사행의 일행인 정사(正使)·부사(副使)·기록관(記錄官) 등의 3 사신 중 기록관이다. 주로 외교문서에 관한 직무를 분담했다.

조기 겸이 서장관으로 활동한 무자년(1828년, 순조 28년) 사행은 1826년 청이 回疆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길이었다.

1828년 4월 13일 길을 떠나 168일 동안 머물렀고, 북경에만 63일간 체류했다. 다른 사행에 비해 북경을 다양하게 경험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온 이듬해 조기 겸은 비변사의 추천으로 암행어사 후보에 올라 거제 고을에 암행을 오게 된다. 당시 거제 부사(巨濟府使)는 민항석(閔恒錫)이었다.

1829년 12월 18일 경상우도 암행어사 조기 겸은 임무를 마치고 서계와 별단을 올리는데, 조기겸이 올린 별단을 보면 거제와 진해에 왜선들의 표류가 많았고, 표류한 왜인들을 구제하는 비용을 거제 고을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거제 부사 민항석은 조정에서 정한 조세를 사용해 왜인들을 구제해야 함에도 조세의 10분의 2~3 정도만 쓰고 나머지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사용하는 부정행위를 일삼았다.

때문에 조기겸은 암행어사의 별단을 통해 당시 거제지역의 상황을 조정에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을 요구한 것이었다.

조기겸이 올린 별단에서 지적된 거제지역의 문제는 이듬해인 1830년(순조 30년) 04월 20일(음)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이 직접 임금을 알현하는 기록에서 당시 거제지역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고 조기겸의 암행어사 활동으로 이후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 있다.

조기겸은 누구나 아는 이름난 암행어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임금에게 받은 봉서와 마패를 가슴에 품고 한양에서 거제까지 천리 길을 걷고 견내량을 건너 거제에 도착해 자신의 발에 흐르는 피고름보다 더 진한 백성들의 피눈물에 더 아파했다.

신분을 감춘 채 거제 고을 칠백리 구석구석을 돌며 백성들의 한숨소리를 끊기 위해 ‘암행어사 출도야’를 외친 조기겸의 정의(正義)는 몇 달 뒤 임금에게 전해져 거제 고을 백성들의 시름을 달랬다.

180여 년 전 거제를 다녀간 암행어사 조기겸의 이름을 환호했던 거제 고을 백성들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다만 기성관 안뜰엔 가을 단풍잎보다 더 검붉게 녹 쓴 그의 공적비만 굳건히 서 있다.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한국구비문학대계, 거제시지, 거제도설화전집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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