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연재 거제의 재발견
거제바당 상군할망해녀와 똥군처녀해녀거제의 재발견 - -거제 해녀의 삶

1. 거제 바당에 울리는 숨비소리 - 거제해녀 이야기
2. 출가해녀 거제 바다에 닿다 - 거제해녀의 역사
☞3. 거제도 인어할망과 인어아가씨 -거제 해녀의 삶
4. 거제해녀 단체 탐방 - 거제해녀컴퍼니·거제해녀학교
5. 거제 바다가 품어야 할 테왁과 자맥질 - 거제 해녀의 현실과 미래

각각 제주도와 창원이 고향인 거제 해녀가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낯선 타향 바다에 몸을 던진 출가해녀, 그리고 막 바다에 발을 담근 초보 해녀의 이야기다.

한 때 ‘대상군’으로 독도까지 바깥 물질을 다녀온 김성량 해녀(72)와 거제해녀아카데미 2기를 수료하면서 해녀의 삶을 얻은 이소영 해녀(41)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인터뷰를 편지글 형식으로 소개한다.

dear. 미래를 여는 해녀 후배들에게

안녕하세요. 거제에서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 김성량입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탓에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배운 물질이 지금 제 삶에 전부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하군 정도의 해녀지만 17~18살 즈음부터 한창 물질을 나갈 때는 어느 누구한테도 뒤처지지 않는 ‘상군 해녀’였습니다.

제주에선 실력은 있지만 체력이 뒷받침 못해주는 해녀를 얕은 바닷가 돌에 붙은 오분자기만 딴다고 해서 ‘오분자기 상군’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기도 하지만, 아직 제 몫은 충분히 해냅니다.

제주도에선 정해진 바닷가에 일하는 ‘갯물질(덕물질)’이 많았는데 바깥 물질을 나와 보니 배를 타고 작업 장소까지 가서 일하는 ‘뱃물질’이 많더군요. 거제도의 물질도 대부분 ‘뱃물질’입니다.

뱃물질은 내가 스무 살 즈음 독도에 바깥물질을 나가면서부터 경험했습니다. 독도에서 물질하던 시절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또 포항,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닿았는데 물질 간 15명 중 대부분이 또래 해녀들이어서 참 재미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고무 소재의 해녀복이 아닌 ‘소중이’라는 해녀복을 입고 일 하던 시절, 또래 해녀들과 함께 임시 천막을 치고 ‘불턱’을 만들어 불을 피우며 밤늦은 시간까지 노래도 부르고 수다도 떨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오는 보급선과 물물교환으로 물과 식량을 얻다가 식량이 떨어지고 기상악화로 보급선이 한창이나 도착하지 않을 때엔 동섬과 서섬 사이에 밧줄을 묶고 독도수비대 순경들을 찾아 식량을 얻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1960년대) 독도에 근무하는 순경(독도수비대)들이 6~7명 정도 있었는데 유일한 놀이가 숙소에 마련된 탁구장이 전부여서 가끔씩 해산물을 교환할 때면 순경들과 탁구장에서 함께 이야기도 나누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독도에 한 번 나가면 석 달 정도 머물렀는데 한 번 다녀오면 30만 원(당시 자장면 한 그릇 35원) 정도로 꽤 수입이 짭짤했었습니다. 7남매 중 둘째인 제가 벌어 온 돈은 집안 살림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독도에서 2번째 물질은 결혼(23세)을 하고 울릉도에 정착해 살던 때입니다. 첫 애를 낳고 독도 인근에서 해녀가 아닌 머구리 작업도 잠시 했습니다. 내 몸무게 두 배 가까이 되는 잠수복과 수중호흡기를 달고 바다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위험한 일이었죠.

70년 즈음엔 제주도 사람이 경북지역에서의 물질이 금지돼 다시 고향(제주도)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향에선 제가 들어갈 수 있는 바다는 없었습니다.

바다에 다시 나간 건 남편이 교통사고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구룡포, 매물도, 울릉도, 경남 고성 바다까지 생계를 위해 뛰어든 바다였습니다. 물건이 있으면 어떤 바다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거제 바다는 지난 2001년, 조선소에 일하는 아들을 따라온 가족들이 모두 거제도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만났습니다.

요즘은 거가대교 인근에 등대가 보이는 버드네로 물질을 다닙니다. 이 나이에 물질을 하는 해녀들은 다 그렇겠지만 물질 실력이 예전만 못합니다. 그래도 가만히 늙어 지내는 것보단 일하러 가는 날이 훨씬 마음 편하고 행복합니다. 특히 요즘은 이제 막 물질을 배우는 해녀들을 보면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물질을 배워야 했던 시절, 해녀라는 직업은 사람들에게 미천하고 위험한 직업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문화유산이 됐기 때문이죠.

몇 년 전부터 해녀아카데미를 통해 해녀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해녀문화를 배우고 해녀로 성장하길 원하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 미래의 해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대상군’도 양손에 쥘 수 있는 만큼만 허락하는 것이 바다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해녀에게 남는 건은 ‘물건’이 아닌 ‘물숨’입니다. 욕심만 없애면 죽는 날까지 할 수 있는 해녀라는 직업은 매력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라져가는 해녀의 문화를 계승하고 널리 알리는 젊은 해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18년 8월 20일 거제해녀 김성량 올림

TO. 거제시민 여러분께

안녕하세요 거제시민 여러분 ‘상군’ 해녀를 꿈꾸는 초보 해녀 이소영입니다.

저는 거제해녀아카데미 2기생으로 거제 바다와 첫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해녀를 알기 전부터 취미로 즐기던 스킨스쿠버 활동으로 바다에 대한 매력에 푹 빠져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해녀 관련 다큐멘터리가 제 심장을 뛰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을 사로잡은 대목은 자연 속에서 노력한 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거제해녀아카데미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연락을 했지만 이미 거제해녀아카데미 1기 모집이 끝난 뒤여서 1년 뒤 2기 과정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주도에도 해녀학교가 있지만, 수료를 위해선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다 경비도 만만찮게 들었기 때문에 거제해녀아카데미만이 해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1년 뒤, 스킨스쿠버를 통해 바다와 가깝게 지내왔던 터라 가볍게 면접을 통과하고 수업만 들으면 해녀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면접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제 생각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해녀아카데미 2기 교육생 정원은 25명에 불과한데 지원자 수는 300명이 넘었으니까요. 어쩌면 10배가 넘는 지원자 속에서 1차와 2차 면접을 통과해 최종 교육생으로 살아남은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교육생이 돼 수업을 받으면서도 적당히 교육만 받고 경험과 기술을 익히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미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졸업이 다가올수록 ‘해녀 생활을 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해녀가 되기 위해 창원에서 거제로 이사를 왔습니다. 하지만 해녀아카데미를 졸업했다고 해서 아무나 해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바다도 어촌계의 허락 없이 물질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해녀 일을 포기할 수 없어서 무작정 거제해녀아카데미 교장선생님을 따라다니다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제해녀아카데미 교장선생을 비롯해 함께 일하는 선장님과 해녀분이 ‘얼마나 버티겠냐’는 마음으로 기대 없이 배부터 태웠다고 합니다. 보통 처음엔 열정을 보이다가 막상 본격적으로 물질을 배우게 되면 중도에 포기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죠.

말 그대로였습니다. 처음에는 배 타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업을 위해 배에서 내려준 바다엔 물건(해산물)이 없었습니다.

해녀는 잠수 능력도 중요하지만 물건을 보는 눈도 좋아야 하기 때문에 물건을 보는 적응력을 키우고 조류 등 물질을 위해 필요한 경험을 쌓는 훈련인 셈이었습니다.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고무 옷을 고집하는 이유도 알게 됐습니다. 장시간 작업을 하기 위해 고무 옷은 보온성은 물론 부력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둘 바다와 해녀를 이해할 때쯤 안전요원 자격증까지 취득했고 물건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전복이 눈앞에 처음 나타났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 만난 전복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찰나의 순간 한 번에 따야 하는 전복을 얕보다 ‘물숨’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선배 해녀들이 평소에 심심찮게 하던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물질 배우려면 선배들이 코푸는 것 까지 따라 해야 한다”

물질을 배우면서 바다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또 바다가 나를 어디까지 받아 줄 것인지, 내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지 지금 현재 바다를 통째로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많이 부족한 ‘하군’이지만 언젠간 ‘대상군’이 될 날을 기억하며, 또 거제해녀가 해녀의 대명사로 불리는 날까지 노력해볼 작정입니다. 시민 여러분들도 거제해녀와 해녀문화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8년 8월 21일 거제해녀 이소영 올림

P.S 최근 전갑생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및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은 본지 기사를 읽고 “1896년 동부면 저구리에서 제주해녀 100여 명이 영친황궁에 사례급 혹은 세금으로 구역별 50원을 낸 기록이 있어 출가해녀의 거제 정착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면서 “이 사실은 이후 거제해녀의 실제 효시인 거제한산모곽전조합의(동아일보, 1928. 5. 5)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왔다.

또 “통제영 소관 어장과 모곽전이 어떻게 민간에 이전됐는지 알아보면 거제도에 거주한 초기 해녀들의 역사를 더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대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