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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의 계율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 바른정법, 바른인연(53)

스님네가 출가하여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지키지도 못할 그 많은 계율을 지키겠다고 무릎을 꿇고 부처님 전에 맹세하고는 드디어 남자 스님인 비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때부터 이것은 제불을 기만하고 자신을 속이는 거짓 약속의 시작인 것이다. 비구가 되는 순간부터 사실 이렇게 거짓말로 그 성스러운 신분을 취득했으니까 말이다.

비구!
그 이름만 들어도 수행하는 수행승이라면 전율이 느껴질 것이다. 여기에 마하승가율(摩訶僧伽律)에서 설명하는 다섯 가지의 뜻을 심도 있게 분석해 보게 되면 저절로 가슴이 저미어 온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칭 가운데 이 보다 더 명예로운 이름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박사와 그 어떤 대통령도 어떻게 감히 이 거룩한 이름에 비길 수 있겠는가?

[머리 조아려 대 비구들에게 귀의하옵니다. 능히 사바세계 복전(福田)을 끌어 모으시는 분들이시여!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며 안락(安樂)을 위해 수행하시고, 윤회(輪廻)의 줄기를 잘 끊어주시는 분들이시므로 저희들이 정례하옵니다.] 라고 격찬한 해우경(解憂經)의 말씀처럼 이 비구라는 호칭은 오늘날 제일 문제시 되는 재물, 여자, 술, 담배는 기본이고, 250 가지나 되는 계율을 모두 다 지킬 때라야 만이 비로소 얻어지는 최상의 존칭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정문경(천정문경)에서 그런 수행자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아름답다 하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청정 비구라는 수식어로 자기 자신을 미화시킨다.
비구! 그 자체만 하더라도 청정의 극치인데 또 무슨 청정이 더 붙을 필요가 있다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즈음 종교인들이 TV등의 매스컴을 통해 그들의 행위를 봐서는더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수행자는 겸손이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하는데 그 계율을 다 지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자기 스스로 불교 사문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독신 수행자라고 해야 만이 더 격에 맞는 신분 소개가 될 것이다.
원효 스님까지도 그의 저서에서 단 한 번도 자기를 비구라고 자청해 소개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요석궁에 들어가기 전에 쓰신 그 분의 방대한 저술 전반에 그런 흔적이 그 어디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장아함경, 대반열반경, 정법염처경, 유가사지론 등에 비구가 행하여야 하는 덕목을 자세히 열거해 놓고 있다.
그것을 보고 우리가 도대체 누군지 어떤 신분에 속해 있어야 하는지 요즈음 승가의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이 기회에 냉정하게 살피고 살펴봐야 할 것이다.
불가의 용어인 바라제목차란 넓은 의미로 계율 전반을 뜻하는 말이다. 불교의 계율은 꼭 지켜야 할 수행생활의 적절한 규범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목적이 아니고 하나의 중요한 수단에 그칠 뿐이다. 그러함에도 많은 사람들이 계율 그 자체를 불교의 정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기들이 세속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도덕적 관념의 잣대로서 수행자는 청정승과 파계승으로 갈라 나누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분별이다.
열반경(涅槃經)에서 [계(戒)는 온갖 악(惡)을 멀리하고 선법(善法)을 짓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선법이 생겨나도록 하는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마치 대지가 온갖 수목을 생기게 하고, 장육(長育)시키는 것과 같다.] 고 하셨듯이 계율(戒律)은 단지 선정(禪定)에 들어갈 수 있는 토양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바탕이 되고 있을 뿐이다.

대승계경(大乘戒經)에서 [차라리 목숨을 버려 죽음으로 달려갈지언정 마음을 방종하게 가져서 재물, 여자, 술, 담배 등등을 금지하는 계율을 어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는 경유에는 인생을 파괴하는데 그치지마는 계율을 어길 때에는 백만 생에 걸쳐 지옥에서 헤매게 될 것이기 했다.] 고 하신 것처럼 계율의 바탕 없이는 절대로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계율은 생사의 바다를 건너는 나룻배와도 같고, 천상의 세계를 다다를 수 있는 사다리와도 같은 것이다.
또 그것은 근기가 미천해 스스로 날지 못하는 불쌍한 중생들에게 필요불가결한 날씨가 되어 주는 것이다.
마치 벼룩이 독수리 깃털 속에 들어가 히말라야 산을 넘어가고, 앉은뱅이가 비행기로 천리를 단숨에 날아가는 것처럼 계율로 인해 엄청난 정진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계율로 인한 지혜의 발로에 있다.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도 선정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는 차라리 마음씨 좋은 암소보다도 더 못한 삶을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 밖에 되지 못한다.
선정에 들어가도 지혜를 발현해 내지 못하면 모든 신자들의 단순한 추앙에 묶여 버린다. 그들은 출가 수행하는 승이 아니라 외형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극기하고 있는 체 하는 위선자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계율 그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고 그것을 지키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면 그것은 해탈을 하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 직업적 수행에 그칠 우려가 다분히 있다.
왜 신라시대 때 원효 스님이 요석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가를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 이유를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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