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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게 살아라도안 스님/연등사 주지

- 바른정법 바른인연(52)

이 글은 소납의 법 은사이자 대한불교 조계종의 대종사이셨던 무진장 큰스님께서 조계사에 계시면서 하셨던 법문을 올립니다.

“고요하게 살아라. 그러면 그 속에 길이 있다”라고 부처님은 [화엄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을 공부해 보면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만나 공부할 때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문수보살입니다. 그리고 53번째 만난 보살이 보현보살입니다.
이 때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자비(行願),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불교의 핵심인 자비와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재동자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법문을 문수보살에게서 듣게 됩니다.
왜 그 법문이 위대한가 하면,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이라고 하는 거울 속에 자신의 지나온 일생을 비춰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탐진치(貪瞋痴)를 문수보살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겁니다.
얼마 전 ‘부처님 오신 날’ 여기 오신 분들은 대 자비이시고, 대 어버이이신 부처님 전에서 자신을 바로 보세요. 그리고 부처님 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낱낱이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사주, 철학, 삼재, 부적 등을 멀리하고 정법 불교를 바르게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불교는 믿는 종교가 아니라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종교이며, 지혜를 증득하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러한 고귀한 법문을 듣고 실천하면 확실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수행하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 존재인 각종 神(산신, 용왕, 칠성 등등)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맹목적으로 부처님 앞에서 소원을 빌어서 행복해지는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 나이가 50~60대인 사람들은 상당히 통제된 사회를 살아왔었던 사람들입니다. 그와 반대로 젊은 사람들은 좀 더 개방된 사회를 경험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습니다.
통제된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개방된 사회에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요즈음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뭔가 위태롭고 무질서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개방된 사회에서 생활해 온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보면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서로 서로가 갈등하고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더 불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것을 살펴봐야 하는지? 그 방편이나 도구가 필요하다면 어떤 것이 그에 맞는 도구가 될는지? 종이를 자르는 데는 가위가 필요하고, 마당에 서 있는 나무를 베어내기 위해서는 도끼나 톱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유교사상을 경험하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유교의 핵심사상이 될 수 있는 ‘중용(中庸)’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불교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중도(中道)’를 아는 이는 흔치 않습니다.

불교의 중도(中道)는 연기(緣起)를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나’라는 존재가 어떤 연관 관계 속에 살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많다는 것입니다.
절대 ‘나’를 모르서고서는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면을 통해 우리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일러 드리겠습니다.대한불교조계종을 비롯해 대형 종단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금강경’에서 “나 이외에 모든 이들을 공양하라”고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공양이란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나 말고 다른 이들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나만 위해 살면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존심을 놓아버리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 가슴에 알량 남아있는 자존심이라는 것은 백년을 가꾸고 살아 온 향기가 나지 않는 놈이 그 자존심이라는 놈입니다. 그러한 것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절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혜와 인격을 갖추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합니다. 성불이란 인격을 완성하는 것(야뇩다라삼먁삼보리)이라 했는데...
그러면 인격의 완성은 불교인들만이 독점 가능한 것인가요? 모두들 집착(集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교만하고 자존심을 세우며,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따르는 것은 부처님을 닦기 위해 불교를 믿는 것입니다.

불교는 내가 따로 있고, 부처님이 따로 있어 내가 부처님을 따르면 부처님이 내게 무엇인가를 해 줄 것이라 착각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러한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내 불행을 부처, 예수, 노자, 공자가 해결해 줄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창조적 인격상을 만들어 부처님과 같은 이상적 인격을 갖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진리를 말해서는 만 겁의 세월이 지나가도 견성은 불가능합니다. 요즈음 어리석은 사람들은 법좌(法座)에 올라 입으로만 말하며, 앵무새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백 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산에서 내려와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치고서 큰 절, 작은 절 할 것 없이 절집 생활을 하면서 법당 안을 들어가 보면 굉장히 어두움을 느낍니다.
이 때 세속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법당 안을 환하게 밝힐까? 논리적, 학문적인 연구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이 어두운 방 안에서 스위치를 눌러 단박에 어둠을 밝히는 ‘선(禪)’ 공부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짓는 사특한 지혜를 가지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한 생각을 바꿀 때라야 만이 가능하며, 그런 면에서 ‘선(禪)’이라는 것이 대단히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고생해도 해결되지 않는데 손가락 하나로 스위치만 누르면 온 법당(육신을 말함) 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선을 닦는데 어떤 자격이나 차별이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 닦는 데는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습니다.
선(禪)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오직 한 생각을 바꾸는데 그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일체의 반야 지혜가 다 자기 자신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밖에 있지도 않으며, 더 더욱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 지혜의 출발점은 여러분의 마음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미 [화엄경]에서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들 자신이 중생이라는 미혹한 생각에 집착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가장 놀랐던 것이 “일체중생 모두가 부처인데.. 왜 중생이라는 탈을 쓰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주 만물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다 얽혀 있는데, 오직 ‘나’밖에 모르는 중생심(衆生心)만 앞세워서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비단 불교만의 진리는 아닙니다. 혹시 오늘 법회에 나오기 전에 나는 불교를 안 믿으니 안 간다고 했던 분이 혹여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있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인생의 문제가 없다면 종교가 왜 필요하겠습니까?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입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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