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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으로 돌아가자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바른정법, 바른인연 (51)

마음의 심원으로 돌아가는데는 엄청난 용기와 냉혹한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권력과 명예, 재물을 쥐고자 하는 중심 없는 사람들과 같이 뒤섞이어 그들의 허황된 논리에 떠밀리어 방향까지 잃어버리고 있다.

군중들의 무리 속에서 어린 아이들이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군중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뒤엉켜 떠밀리고 있다. 물통에 담아놓은 미꾸라지들처럼 서로 밀치면서 위로만 올라가려고 한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힘 있고 말 잘하는 사람들만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다. 그곳으로 나아가면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 곳에서 과감히 떨쳐 나와야 한다. 서로 부딪히며 살기에는 너무 과격하고 거친 상대들이다. 모두 다 자갈을 금 덩어리로 착각하고 몰려들기 때문이다.

아니면 하잘 것 없는 뼈다귀에 개미들이 모여들 듯 서로 물고 뜯기 때문이다. 개미들의 전쟁을 본 적이 있는가? 넓고 넓은 땅덩어리 위에서 자기 구역을 침범했다고 처절한 살육을 벌이는 개미들의 전쟁을 의미있게 본 적이 있는가? 개미들은 땅 밑에 집을 짓고 산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라고 해서 땅 위에다 집을 짓고 산다. 진정 사람이라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세와 부귀가 얼마나 허망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그 개미들의 전쟁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경쟁심 속에서 삶의 숨결이 흐르는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사실 죽음을 부르는 신음소리와 같다. 그러나 진정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신음소리는 아니다. 한숨과 비애, 허탈과 좌절이 점철되어 새어 나오는 군중들의 신음소리일 뿐이다.

자기 내면으로 찾아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곳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제 지금 평화스러운 숨결로 그들을 가볍게 내려다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곳을 벗어난 이들은 이제 오직 자신의 진면목을 찾는데 전심, 전력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내면의 가장 은밀한 곳 까지 파고들기 위해 주야장천 모든 본능을 억제해 갈 것이다.

그리고 끝없이 자기와의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우리는 수행자라고 부른다. 그들의 마음은 이제 그 어떠한 대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어떤 조건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아함정행경(阿含正行經)에 수행자는 마음을 지니되 거대한 바윗돌 같이 움쩍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비록 오욕의 세상 가운데 있지만 비가와도 젖지 않으며, 해가 비쳐도 녹지 않으며,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네모난 돌 같이 그 마음을 부동시켜야 한다.

그래야만이 참다운 선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말처럼, 그들의 마음은 이제 그 어떠한 유혹에도 요지부동하여 한 치도 움직이지 않게 된다.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살다보면 선정의 힘이 무르익게 될 때 네 가지의 고통이 사라진다.

첫째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번뇌가 없으면 바로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듯이 상대적 분별을 벗어난 그 마음을 창공에 구름처럼 걸리는 것이 없다.

둘째는 육신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 질병과 음욕, 그리고 기아와 고독이 엄습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의 육신을 하나의 집으로 완전히 체득하고, 그것이 낡으면 곧 다른 집을 지어 거주한다.

셋째는 죽음을 초월한다. 죽음은 시간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생사의 틀 속에 얽매이지 않고, 그들에게는 오직 고통을 받아야 하는 지옥 같은 세계가 없고 기쁨과 즐거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넷째는 그 어떠한 요귀에도 절대 홀리지 않는다. 어설픈 경지에 오르면 요귀가 그 사람을 힘을 빌려 기이한 신통과 예언을 지어내게 하지만, 이 정도의 선정에 들어가면 그 어떠한 악귀라도 감히 침범할 틈을 찾지 못한다. 귀신의 장난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이것들이 바로 선정으로 얻어지는 크나큰 공덕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남의 땅이나 남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돌리어 자기 자신에게 먼저 회귀해야 한다. 그것이 순리이고 도리이다.

사람들은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히 말한다면 틀린 말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궁극적으로 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마음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사실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공(空)의 세계를 말한다. 그 공(空)의 언저리를 우리는 편리하게 마음이라고 부르지만 그 마음 자체가 수행의 궁극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짜의 마음은 그 본성이 허공과도 같아 언제나 독자적인 존재에서 대립하는 것이 없고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대보적경(大寶積經), 유마경(維摩經), 반야경(般若經)등에서 잘 얘기해 주고 있다.

또 불교를 마음 닦는 종교라고 하지만 사실 그 마음의 바탕은 단 한 번도 더러워진 적이 없다. 더러워지지 않았던 마음을 어떻게 닦아낸단 말인가?

닦는다는 말은 불순물이 개입되어진 것을 의미하지만 그 마음 자체는 태초부터 그 어떤 죄악에도 오염되어진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본성은 바로 공(空)의 토대위에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서 중생의 마음 그것은 열반과 상통한 것이니 그 본성이 언제나 항상 청정해 오염됨이 없어서 허공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셨으며,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마음의 자성은 본래 공적하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공(空)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그 공(空)에 의한 허상을 어리석음으로 집착하다 보니 생사의 괴로움이 끊임없이 윤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신론(起信論)에서 세상의 온갖 경계가 다 중생의 무덤에서 나오는 망령된 마음에 의해 존속된다. 그러므로 온갖 형상들은 모두 다 공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도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다. 망령된 마음이 생기면 차별적 생사의 현상이 생기고, 그럴 마음이 없으면 차별적 괴로움이 없어져 버린다고 한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공(空)의 마음인 원각에서 일념의 어리석음이 일어나기만 하면 절대적인 원리의 마음과의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크게 갈라져 버린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언제나 망념만을 일으키는 중생들은 참다운 공(空)의 마음 경지를 철저히 등지고 살아간다.

능엄경(楞嚴經)에서도 중생들의 근본 마음은 허공보다 더 크다. 그렇게 큰 허공 또한 중생의 근본 마음인 공(空)으로부터 일어난 한 개의 거품과도 같은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작고 협소하게 움츠러져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니 세상이 비좁아서 발 디딜 틈의 여유가 없게 된 것이다.

세상은 무한이 넓고 끝없이 광대한데도 인간들은 그 무변한 세상을 자기들의 소견머리에 짜맞추어 육신만이 거주하는 한정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살육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비좁은 땅을 더 넓히기 위해서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켜 죄 없는 땅덩어리를 초토화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땅은 얼마가지 않아 또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들은 또 다시 서로 부딪히지 아니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이 있는 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다반사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광대무변한 허공 세계를 볼펜 구멍으로 힘겹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넓고 넓은 우주가 겨우 동전만한 크기로 축소되어 버리고 말았다. 부처님께서 제발 그 무명(無明)으로 조립된 낡은 볼펜 뚜껑 좀 던져 버리라고 애걸복걸 하셨지만, 인간들은 그것이 없으면 하늘을 결코 쳐다볼 수 없는 듯, 그것을 움켜지고 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갈등과 충돌이 서로 간에 끊임없이 계속되어 이토록 험악한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본 자성의 마음을 회복하여 심원의 세계로 돌아가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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