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나목에 꽃이 피었다. 시인의 집이었다. 우수절기에 핀 성급한 매화라면 반길 일이련만 자세히 보니 ‘그꽃’의 민낯이었다.

근자에 개진되는 ‘미투’ 운동에 탄력을 받아 일부 여성들이 숨겨둔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가해자들은 해당 분야에서 명성을 얻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남성들이다. 자신이 만든 퀼리티를 이용하여 성폭력(법률에 의하면 강간, 성희롱, 음란전화, 성기노출, 추행 등의 형태를 포함)을 행사했던 것이고, 그로인해 곪고 곪은 종기가 터져버린 것이다.

다른 분야는 차치하고 문단만 보자면,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작품(괴물)에 En선생의 추행을 까발렸다. 화려한 포장 속에서 나온 썩은 생선은, 변방의 독자에게 상상밖의 충격이었다. 피해자의 진술은 긴 세월동안 앞앞이 말 못한 한(恨)이었고 울분이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정말 여러 차례, 제가 문단 초기에 데뷔할 때 여러 차례 너무나 많은 그 성추행과 성희롱을 저희가 목격했고...” 그 말에 덧붙이는 증언이 이어졌다. “그것은 전설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할 정도로 오랜 시간 파다한 문단의 일상 같은 일이었다.” “문단이건 다른 문화 예술판이건 젠더 감수성, 일상적 인권 감수성은 거의 제로라서 어딜 가든 크고 작은 En선생들이 즐비했다고 보면 된다.”(황해문화 주간 인터뷰 일부) “놀랍고 지겹다. 6~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들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다”(류근 시인) 등등.

한 신문사 전화를 받은 En은 "술 먹고 격려도 하느라...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있었다면’이란 가정법을 쓴 이 짧은 변명은 오만과 자기모순을 보여준다. ‘의도도 없었고 기억에도 없는 데’, ‘사과를 드린다’는 건 문맥상 과오를 시인하는 것이 된다.

문학 강좌에서 가끔씩 그의 시를 인용하는 나는 ‘올라갈 때 못 보았지만 내려올 때 보게 된 그 꽃’, 짧지만 긴 울림을 주는 시의 함의를 ‘중년기 우리의 과제’로 해석했었는데, 멋지게 한 방 맞은 기분이다.

하반신을 가려주는 울타리가 말을 한다면 시인에게 무어라고 할까. 수필이 아닌 한, 작품과 작가는 별개의 자율성으로 존재하니 자책마라고 두둔 할까, 아니면 맑고 투명한 시어로 독자를 사로잡은 이중성을 부끄러워하라고 질책할까. 추측컨대 후자 쪽이리라. 식물은 시종(始終) 자연의 섭리에 반항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등급과 서열을 정해 가치를 매기고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노선을 정해 강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약자를 지배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문학은 그러한 인생의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시종(詩宗) 입장이라면 그 사명감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이제 그의 시는 욕정을 함부로 배설한 넓은 환유 속에서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En은 노정권 당시 100여명의 좌파 문인들과 함께 두 번째 평양 방문을 했다. 첫 번째 방북은 김대중 정권 당시 대통령 평양방문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합류했다. 만찬장에서 즉흥시를 낭독하고 김정일과 건배하며 독재자의 무병장수를 비는 사진을 보면 천하를 다 얻은 표정이다. 한 기자가 회견장에서 그에서 물었다.“시인은 왜 굶주리는 북한 주민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까?”“우리나라 서울 달동네도 그렇지 않습니까. 굶주림은 북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빈민구제 못합니다.”“굶주리는 북한 주민의 참상과 우리나라 달동네 빈민의 문제가 같다고 보십니까?”“국가 최고 지도자가 모든 걸 책임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파편적으로 들려오는 말이나 소문으로는 실상을 알 수가 없어요.”그는 북한 독재집단의 인권유린에 대해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른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기회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언변 덕인지, 김대중·노무현 집권기 때 정권 차원에서 노벨상 수상을 밀어준 특혜를 받았고 지금까지 줄곧 한국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당시 자신이 애정을 가진 대선 후보(文)를 칭찬한 대목이 새삼 회자되고 있다. ‘보통 정치하는 사람들은 똥갈보 같은데, 이 사람만은 숫처녀다’ 아부성 발언과 당파색은 차치하고라도, 대시인의 언어가 포장 속에서는 똥갈보 수준이었음이 이번에 공개되었다. 그동안의 신화는 깨어졌다.

온종일 언론이 떠들고 있을 때였다. 그는 도둑고양이 모양새로 잠시 밖에 나왔다가 정원 울타리 너머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의 앵글에 잡혔다. 평소에 기자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였던 분이 그날은 회색모자, 선글라스, 흰색 마스크를 착용하고 외부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최근 그는 ‘어느날’이란 제목의 시집을 냈다. 기자가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시나요?”라는 물음에 “삶은 모를수록 삶이겠죠”라고 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말씀인데, 그래도 뿌린대로 거둔다는 인과율의 법칙은 알았어야 했다.

오늘은 연극계의 대부가 TV시청자 앞에서 성추행을 인정하며 사죄했다. 몇 십 년 화려했던 꽃의 낙하는 추하고 짧았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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