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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전투와 역사적 평가원순련 /거제대 겸임교수

병자호란 중인 1636년(인조 14)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남한산성에서 조선군이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다 결국 실패한 전투를 우리는 남한산성 전투라고 한다.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 중의 하나는 친명반청(親明反淸)이었다. 광해군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최명길은 이 시기부터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하였다.

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년) 중원을 장악한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청과의 일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최명길은 인조가 강화도로 하루빨리 옮겨가기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이제 조선 정부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청과 강화를 맺어야 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강화가 성립되어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는 수모를 겪었다. 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 전투가 영화로 제작되어 우리 지역에서도 상영되면서 많은 호응을 받고 있으며 위 내용은 ‘남한산성’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이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후금의 사신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주장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리고 실지로 전쟁이 일어나자 싸우자는 소리만 했지 실제로는 아무런 방책이 없이 우왕좌왕 할 동안 병사와 백성은 죽어만 갔다. 화면엔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의 불꽃 튀기는 논쟁이 오고 갔다. 최명길의 강화론은 간단했다. 전쟁의 지속은 백성들만 도탄에 빠뜨리는 무모한 도전이며, 굴욕일지언정 백성을 무마시키고 종묘사직을 지키는 길은 화친뿐임을 주장하였다. 죽어서 살아나는 방도도 생각해 보자는 최명길의 간곡한 충언이었다.

김상헌 또한 예조판서의 위치에 맞는 충언을 쏟아내었다. 조선이 청나라에 무릎을 꿇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살아서 죽느니 차라리 죽어서 살 것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강화는 절대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누가 항복을 하겠다는 문서를 작성하는 일에 앞장설 수 있을까? 최명길은 항복 문서를 쓰게 되면 만고에 역적으로 남게 됨을 알게 되지만 그래도 죽어가는 백성을 위해, 패전의 나라에 서게 될 왕을 위하여 항복의 국서를 쓴다

‘우리가 비록 만고의 죄인이 될지라도 차마 임금을 반드시 망할 땅에 둘 수는 없으니 오늘의 화친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며 국서를 쓴 날이 1637년 1월18일 이었다. 결국 인조임금은 삼전도 굴복을 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엎드린 최명길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최명길이 세상을 떠난 후 조선사회는 더욱 더 의리나 대의명분을 중요시 하는 사회가 되었고, 그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일 수 없었다. 만고에 역적이 될지라도 군왕과 백성을 위하여 항복 국서를 쓰겠다는 최명길의 말대로 조선시대 시류들이 어떤 평가를 해 놓았는지는 여러 자료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두 정승이 화해를 나눈 충정의 방향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강화가 이루어 진 뒤 최명길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이 청과 강화를 한 것은 종묘사직 보존을 도모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낸 것이 탄로되어 1642년(인조 20)에 명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청국에 소환되었다. 최명길은 용골대의 심문을 받으며 왕은 모르는 일이고 자기가 전적으로 한 일이라 했다. 이윽고 수갑과 쇠사슬이 채워진 상태로 사형수를 가두어두는 북관에 이송되었다. 이듬해 4월 최명길은 북관에서 남관으로 이관되었는데, 당시 남관에는 김상헌이 수감되어 있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표가 나라를 위하다가 청나라의 감옥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최명길은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김상헌의 모습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탄복하였다. 김상헌도 최명길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없는 인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강화론이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풀고 시를 지으며 우정을 나눴다.

양대의 우정을 찾고 / 從尋兩世好 백 년의 의심을 푼다 / 頓釋百年疑

김상헌의 시를 받은 최명길이 답시를 주었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 君心如石終難轉
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네 / 吾道如環信所隨

머나먼 타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한 것이다.

‘조정에는 나같이 이런 항복의 문서를 쓰는 사람도 있어야하고, 찢어버리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김상헌이 찢어버린 문서를 주우며 최명길이 한 말이다. 우린 역사를 어떻게 평할 것인가?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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