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나는 야(野)한 개가 좋다윤지영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발바닥에 물컹한 느낌, 개 배설물을 밟았다. 칼로리 소모량을 극대화 시키려고 보폭을 넓게 팔을 힘차게 저으며 속보로 걷는 중이었다. 시야에 젊은 여자를 따라가는 중견이 포착됐다. 물증을 사진 찍어 과태료를 물게 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성가신 일이라 ‘개가 쾌변을 했다’고 한 마디 던지며 지나쳤다. 여자가 뒤돌아보며 “쥬디” 하고 부르니 개는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다.

잠시 쉼터에 앉았는데 주변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사람의 부음이 들렸다. 작가 ‘마광수 교수’ 사망소식이었다. 국문학자인 그는 당대 한국문학 품위주의가 21세기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즐거운 사라’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은 보수적 억압을 수용하는 전통문학에 맞짱 뜬 작품이다.

후폭풍이 거셌다. 기성 보수주의 문인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저자에 집단 몰매를 가했다. 특유의 에로티시즘을 문학이란 장치로 공론화 시켰다는 게 이유였다. 나도 ‘사서 볼까?’ 하던 호기심을 접고 빌려 본 적이 있는데, 서문에 나타난 작가의 의도는 대충 이런 요지였다. ‘지금 우리나라의 성문제는 마치 쓰레기통에 뚜껑만 덮어놓은 것과 같다...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이중적 사고방식의 논리만이 판을 치고 있다.’ 양지에서 엄한 척, 정의로운 척, 도덕군자인 척 하지만 사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내 놓은 글 같았다. ‘비겁하게 숨어서 그러지 말고 차라리 당당하게 나와서 하라’고 솔직함의 컨셉을 전면에 내세웠는데, 체면이 우선하는 이 땅에서 결코 쉽지 않은 용기임에는 분명했다.

여자의 개, 쥬디는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는 기색이 없었다. 주인이 사 준 옷을 입고, 나비타이를 하고 목줄에 걸려 동행하는 모습에서 익숙한 편안함이 엿보였다. 여자가 애견에게 쏟는 정성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개는 자신에게 주는 사랑의 크기만큼 주인이 외로울 때, 적적할 때, 불안할 때 반려자로서 역할을 다 하는 듯했다.

마교수는 대중들로부터 ‘저질’ ‘개소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로인해 왕따를 당했다. 한자(漢字) 개(犬)에서 파생된 복(伏)이란 글자가 든 단어에는 잠복(潛伏), 항복(降伏), 기복(起伏), 포복(怖伏), 애걸복걸(哀乞伏乞), 복지부동(伏地不動)등이 있다. 모두 ‘굴복하다’ ‘엎드리다’의 뜻으로 해석된다.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大:원래 자원은 팔을 벌리고 서있는 사람의 상형)도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두들겨 맞고 멍이 들면 개가 된다. 여기서 개(犬)는 ‘눈탱이에 멍든 사람’ 즉 ‘伏’을 뜻한다. 그 정도로 맞을 겨 경우 몸을 납작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 수도 있고, 안 맞으려고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떨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교수에 ‘개’ 자를 붙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대중에, 권력에 복종하지 않았고 그 죗값으로 형벌도 받았다. 인기 영합주의에 치우쳐 마음에도 없는 도덕군자 소리를 하거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자아비판도 하지 않았다. 주관을 당당하게 펼치면서 마이웨이를 고수했다. 만약 일신의 안위를 챙기느라 ‘남들과 같은 글’을 썼더라면 무릇 애견처럼 평안한 삶을 지속시킬 수 있었을 텐데.

‘쥬디~’, 여자가 개를 불렀다. 잠시 엇길로 가던 개가 다시 동선으로 들어섰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뒤따르며 개에게 물었다. 넌 타이트한 옷, 목을 감은 리본, 방울, 머리핀, 헝겊신발이 좋으니? 답이 없었다. 옷 때문에 체온이 더 올랐는지 헉헉헉 입과 코로 연신 더운 김을 토해 냈다. 여자는 개의 아픔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번에는 여자에게 물었다. 챙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생수를 마시는 그녀에게 어세를 세웠다. 네 눈에 개의 더블 코트가 멋있게 보이냐. 개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제발 옷 좀 벗기고 신발도 벗겨라. 이 더위에 개가 뭔 죄냐. 털이 없는 사람에게 옷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개는 천연소재 옷을 입고 태어나기에 여름 개에 옷은 차라리 형벌이다. 삽살개의 더벅머리 매력을 인위적인 애견 옷에 견줄 수 없고 달마시안의 얼룩무늬는 그 어떤 가죽으로 비유할 수 없다, 동물의 가장 아름다운 때는 본래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좀 알아라. 내 속말을 들을 수 없는 둘은 행복한 풍경을 연출하며 가고 있었다.

마교수는 어쩌면 전생에 견공이 아니었을까. 자유 방목형 유전자로 태어났음에도 외적 억압에 의해 산야의 활보를 저지당했고 애완용품 착용 거부소동 끝에 결국 보편적인 종말을 맞지 못한 셈이니.

주검의 배경을 뒤늦게 조문이라도 하는 양 그를 두고 시대의 로맨티스트로 추켜올리는 이가 생겼다. 유고집 출판에 급 관심을 보이는 독자도 늘어났다. 나도 이제야 ‘야하다’의 뜻이 야(冶)가 아니고 야(野)임을 알게 되었다. 선입견의 오류를 바로잡은 날, 그 여자의 개, 쥬디를 또 만났다. 털에 알록달록 염색까지 하여 더 야(冶)해진 외양으로 주인 주변을 맴돌고 있다. (공격성만 없다면)나는 차라리 야(野)한 개가 좋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거제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