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휴일 남편과 200여개의 난전이 펼쳐지는 걸로 유명한 전남 광양 장터를 다녀오게 되었다. 그곳에는 손님들의 흥을 돋워주는 뻥튀기 장수며 평소에 볼 수 없는 농작물들이 생긴 데로 펼쳐져서는 호객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사진작가 이수길 씨가 펴낸 “어무이, 비 오는 날은 나가지 마이소”란 책에서 본 화보가 지금 이 광양 장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시끌벅적 뻥튀기 장수가 바로 책에 등장하는 배금선 할머니이고 그 옆에 대를 이어 강냉이를 튀기겠다는 며느리 정정임씨인 것이다.

구수한 제목에 끌려 구입하게 된 이 책은 예전 할머니와 함께한 장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내용으로 우리 주변에서 점점 잊혀가는 오일 장터의 이야기와 풍경이 가득하다. 일일이 장터를 찾아다니며 현장감 있게 담아낸 장터 풍경과 시장 상인들의 사연은 책 제목처럼 아련하고 애잔하다.

과거와 오늘이 공존하는 장터, 오늘 이 광양 장터의 무르익는 풍치를 보고 있노라니 내 기억속의 잠자고 있던 아스라한 추억들이 곰실곰실 되살아난다.

나는 여름방학이면 마을 어귀에 키 큰 미루나무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고, 꼬불꼬불한 논배미를 지나면 싸리문 옆에 하늘을 가릴 듯 한 감나무가 있는 외할머니 댁엘 갔다. 나른한 오수를 즐기던 삽살개가 인기척에 깨어서 경계의 눈빛으로 ‘왕왕’ 짖어대면 나는 기겁을 하고 툇마루로 올라갔다. 괴괴한 집안의 무료함에 삼촌 방에서 만화첵애 빠져있노라면 해거름에 논에서 돌아오신 구리빛 얼굴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는 인자한 웃음으로 손녀를 반기셨다.

슬하에 8남매를 두신 외할머니께서는 방학이면 내려오는 손자손녀들 중에서 나와 내 사촌인 미경이를 데리고 곧잘 장에 가셨다.

아침 9시에 성했다가 12시에 파장하는 일명 번개시장은 어린 우리들의 눈에는 경이로운 신세계였다. 형형색색의 화장품 ,바느질, 패물 따위의 현란한 방물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재미있는 만화경의 세계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시게전은 곡식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면서 적정의 금새를 유도하는 넉살좋은 시겟장수가 온통 우리의 넋을 빼앗았다.

장이 파할 무렵이면 외할머니께서는 손녀들에게 속곳의 쌈지에 아껴 두셨던 꼬깃꼬깃한 돈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사주셨다. 아마도 손녀들에 대한 질박한 애정의 표시였으리라.

그 당시로는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저자거리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의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럽게 질서를 이루며 매매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시대의 조류는 할머니 세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재래시장은 초현대식 상가에 밀려 시나브로 사양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전화 한 통이면 배달까지 해주는 극도의 편리만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심리에 편승해 온갖 얄팍한 상술이 난무하는 이 시대가 새삼 삭막한 비애감으로 다가온다.

점점 그 모습이 희미해져 가는 장터. 하지만, 사라져 간다는 것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곳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생생한 삶의 모습, 여전한 모정, 여전한 효심이 있다. 먹고 살고자 하는 투지도 있고, 내 몸 하나 바스러져도 지키고픈 가족도 있다.

“어무이, 비 오는 날은 나가지 마이소”의 저자는 마음의 고향이자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곳이 오일장터라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주인공들의 사연은 이렇다. 40여 년 동안 부산 하단장터에서 한평생 오일장을 지켜 오며 자식 잘 키워 낸 것을 최고로 뿌듯해하는 배위남 할머니. 86년 전통을 잇고 있는 경주 입실장터에는 30년째 도넛 장사를 하는 오공임 씨와 부모의 대를 이어 장사를 계속하겠다는 박근철 씨 등. 오로지 자식을 위한 일념으로 살아온 위대한 삶의 현장이자 엄마의 메아리가 늘 울려 퍼지는 곳이 비로 이곳이니까.

오늘 전남 광양 장터에서 만난 배금선 할머니와 며느리 정정임 씨야 말고 잊혀져가는 장터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한평생 장터에서 삶의 책임을 다하는 진솔한 삶의 감동이 전해온다.

어느새 파장하는 광양장터를 바라보며 매번 장날이면 찾아드는 짐바리들과 어울려 가시던 외할머니의 장 나들이 모습이 내 기억의 투명렌즈에 반사된다. 새삼 이십 년 전 세상을 떠나신 외할머니에게 가만히 외쳐본다. “할머니 비 오는 날은 나가지 마이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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