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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름을 부를 때윤지영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정초부터 내과병원 대기실이 만원이었다. 호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침을 하거나, 콧물, 재채기에 시달리고 있다. 감기환자 1인인 그 속의 나도 무료하게 앉았다가 모니터 대기자 명단에서, TV를 통해 눈에 익은 이름을 보았다.

간호사의 부름에 한 중년 여성이 진료실로 들어갔다. 순간 주변에서 뒷담화 같은 농담이 들렸다. 특검에 안가고 병원에 왔다는 둥, 이름 때문에 스트레스 받겠다는 둥.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과의 동명인들 개명신청이 대폭 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지만 주범과 같은 이름을 면전에서 목격하고 보니, 애꿎은 그 입장이 이해되었다.

옛날 우리나라 여성 이름은 순자·끝자·말자·옥자 같은 ‘자’자 주류를 이루었다. 여식 이름 뒷자를 습관적으로 '자(子)'로 한 까닭은 일본식 작명법을 따랐다는 게 정설이다. '하나꼬' '미찌꼬'와 같은 '-꼬'를 우리식으로 바꿔 불렀고, 후남·순남·위남 등도 딸딸이 집안에서 아들을 낳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렇듯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했던 일명 베이붐 시대에 태어난 여식의 이름들은 부르기 쉬우면 그만이었다.

전통 항렬 한자(漢字), 사주팔자, 성공운, 건강운 등을 고려한 아들 이름의 위세에 억압된 채 딸들은 성장했다. 시집을 갔어도 소외된 형태로 이어졌다. 차별과 편견으로 점철된 여자의 일생에 사회는 굳이 이름 석 자를 요구하지 않았다. 남편의 능력에 편입돼 이름이 빛난 특별한 여성들 -순자·옥숙·명순·양숙-을 제외한 당대 여성 일반은 서러운 호칭과 더불어 그렇게 들풀처럼 살아왔다.

국정농단 사건의 중심인물인 여인 또한 그 흔한 여명(女名)에 속한다. 무릇 ‘순하고 착하게 살라’는 뜻인 것 같다. 그러나 알려진 스토리로 추측해 보면 그녀는 이름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가난한 살림살이, 고난의 세월을 경험한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돈 걱정 안한,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보인다.

부정부패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사건에 명문대 교수군단이 개입되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류철균’ 교수도 거기에 속해 있다. 그의 필명은 ‘이인화’다. 주범의 딸에게 가짜 성적을 제공한 죄로 수의 입고 수갑 찬 그를 보면서 무릇 독자들은 염상섭의 중편소설 한 편을 떠올렸을 성싶다.

‘만세전’ 주인공 이름이 ‘이인화’이다. 이 인물은 일제 식민지 치하의 젊은 지식인이다. ‘나’가 유학지인 동경에서 서울로,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는 여로형 구성으로 되어있다. 그는 이중적이며 나약한 성격의 젊은이다. 우리 민족에 대한 동정과 암울한 시대 상황을 목격하지만 일제치하 민족의 비인간적인 모멸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조국을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자의식을 알 수 있다.

묘지는 생명이 다한, 죽은 존재를 뜻한다. 구더기 끓는 무덤이란 죽은 생명체가 더 이상 소생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썩어 들어가며 형체까지 없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염상섭은 이 작품으로 민족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 주인공 이인화가 암담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타개할 구체적 행동을 모색하기는커녕 오히려 조국의 실상을 ‘구더기 끓는 공동묘지’에 비유하면서 동경으로 쫓기듯이 돌아가는 것으로 당대 지식인들의 안이한 현실인식을 비판했다.

작품 속의 ‘이인화’는 횡보(橫步)가 작명한 것이지만 그 이름 차용은 류철균의 선택이었다. 간결한 필치로 엄숙성과 강인함을 보여주던 그의 평론언어 위에 필명의 아이러니를 느낀다면 지나친 혹평일까.

그는 20대에 교수가 되었고 지금까지 강단에서, 글쓰기로써 진실과 정의를 주장해 왔다. 어떤 외압에도 부정부패 세력에 타협하지 않는, 청년의 올곧은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토로했으리라. 그렇다면 그의 이중적 모습은 교육적 효과를 보다 리얼하게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백번 양보하여 그렇다고 쳐도 ‘이인화’라는 이름은 이제, 소설 속에든 소설 밖에서든 정체성 결핍과 회색주의 아이콘으로 시대의 참혹한 상처가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 우리 반 60명 중 여자 절반에 해당되는 이름 끝 글자가 '자·순·숙·희‘ 등이었다. 내 이름 뒷자도 ’順‘이다. 출생신고 때 잘못들은 면서기 손끝에서 ‘仙’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스무 살 넘었을 때 ‘지혜가 빛나라’고 새이름(智暎)을 지어주셨다. 하지만 지혜가 빛날 기미가 안 보여 이름에 걸었던 기대를 애당초 철수했다.

미상불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가치관이지 이름의 의미소(意味素)는 아닐 것이다. 유명인과 동명이든 범죄자와 동명이든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나 정치권력을 밀실에서 주고받아 나라를 욕보인 이름들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기에 사정이 다르다. 부정적인 성격으로 회자 될 것이기에 동명인들이 개명을 서두르는 모양이다. 이래저래 그들의 농단이 국민 삶에 끼친 악영향은 너무 크다.

언제 어디서든 불리어지는 이름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면, 그게 ‘잘 산 증거’ 라는 생각을 해본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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