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로 접어들면서 피기 시작한 앞마당의 봉선화와 코스모스는 서로 내기나 하듯이 키를 맞대며 풍만한 여름을 장식해 주었다. 내 유년의 기억으로는 장독대 곁에서 예쁘게 핀 봉선화는 백반과 찧어서 손톱에 꽃물을 들이는 꽃이었다.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내내 봉선화 꽃만 있어도 우리들의 여름은 늘 행복을 주었던 꽃인데,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소문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려 아쉬움을 주었다. 반면에 코스모스는 가을꽃이다. 가을바람이 한들한들 불어오고 추수를 시작하는 시기가 되면 길가에 줄을 서서 긴 목을 쭈욱 뽑아 올리고 까치발을 돋우며 우리의 등하교 길을 지켜주던 꽃이다. 뿐만 아니라, 가을바람과 함께 떠나는 사람에게 손 흔들어 보내고 그리운 사람을 기다려 주는 것이 우리고 알고 있는 코스모스다.

그런데 요즘의 봉선화와 코스모스는 피는 시기와 지는 시기가 옛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던 시기와는 사뭇 다르다. 진작부터 앞 다투어 피기 시작한 봉선화와 코스모스는 채 가을을 맞기도 전인 9월이 끝나갈 즈음 모두 자지러들고 말았다. 봉선화야 여름꽃이라 그렇게 사라져도 괜찮은 꽃이지만 가을꽃 코스모스는 아직 채 시월도 끝나지 않았는데 제 몫도 다하지 않고 그렇게 빨리 져 버리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꽃들의 이모작이 시작된 것이다. 시월로 접어들자 봉선화와 코스모스가 사라진 그 자리에 떨어진 봉선화와 코스모스 씨앗이 새싹으로 돋아나 초록색 동산을 만들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유독 가을비가 잦은 탓이었던지 일찍 쓰러진 꽃대궁도 채 마르지 않은 그 자리에 초록의 무리는 계절을 잊은 것 같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이제 곧 계절이 바뀌면 저 새싹들이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은 쓸데없는 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봉선화는 내 걱정은 아랑곳 않고 빨강, 분홍, 하양색의 예쁜 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반면에 코스모스는 봉선화처럼 쑥쑥 키가 자라지 않았다.

어른 손 두어 뼘 정도의 작은 키를 끝으로 더 이상 자라지 않아 꽃을 피울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1월 중순을 넘어서자 그 작은 줄기에 한들한들 꽃송이를 매달기 시작했다. 특이한 것은 어린 아이 손바닥 길이만한 작은 줄기에도 딱 한 송이 꽃을 매달고 가을바람을 맞고 있었다. 코스모스는 키가 자라지 않아 위에서 보면 정원에 별이 내려와 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이모작에 성공한 봉선화와 코스모스꽃을 보고 등산을 하고 오르내리는 사람마다 모두 한마디씩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 년에 두 번 꽃을 피운 봉선화와 코스모스가 만든 이모작(二毛作)의 결실에 한 마디씩 축복을 해 주고 지나갔다.

이모작은 (二毛作) 경작지에서 1년에 두 번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으로 내용 학문상 이모작의 대상경지가 논과 밭 어느 것에 한정된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대체로 논에 대한 것을 의미한다. 논은 일모작·이모작 논으로 구별하고 있지만 밭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는 봄이나 여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는 벼농사에 모내기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못자리를 마련하기만 하면 모를 키우는 동안 해당 자리에 다른 작물을 키울 수 있어 이모작이 널리 보급되었다. 대표적인 이모작 작물이 보리인데, 쌀이 떨어지는 시기와 보리의 수확기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남부 지방은 이모작, 중부 지방은 한 해 걸러 보리를 심는 2년3작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보릿고개 시절 전후까지 보리의 이모작이 활발했으나 보리 수매가 중단된 이후로는 이를 포기하는 농부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 대신 비닐하우스 과일과 쌀의 이모작이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수요의 변화에 의한 농업환경 변화의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이모작이 단일 경작지에서 서로 다른 작물을 1년에 번갈아 재배하는 농사방법이라면 서로 같은 작물을 1년에 두 번 재배하는 이기작과는 구별된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하고, 중국 강남지방에서는 벼의 이기작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발전해 은퇴후 새로운 직업을 가지거나, 그 전에 명성을 날리던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자리에서 새로운 명성을 얻는 것을 두고 인생 이모작 (二毛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퇴임시기가 빨라지면서 모든 퇴임자들이 은퇴 후의 삶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인생 이모작 (二毛作)을 찾아 떠나는 길이 예사롭지가 않다. 무얼 해야 하는지? 일을 찾기는 했지만 내가 과연 해 낼 수는 있는 것인지? 그리고 지금 이 나이에 과연 일을 해야 할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퇴임자들의 인생 이모작을 향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젊었을 때 빨리 돈을 많이 모아서 은퇴한 다음에 저축한 돈으로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당연시 되어 왔다. 하지만 베이비부머 세대의 엄청난 은퇴와 함께 저금리 및 자산가치의 급격한 하락에다가 경제 불황과 각종 위기를 겪으면서 점점 인식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인생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는데 필자도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즉 55세 전후로 은퇴를 하고 수명을 90세로 잡더라도 35년이라는 긴 기간이 남았다. 이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은퇴할 때까지 직장생활을 하는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55세 시점에 인생 2막이라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의 새로운 일거리와 본인의 건강, 배우자와의 좋은 관계가 기초자산이 된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곧 2016년 막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봉선화, 코스모스도 이모작으로 피워나 오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거늘, 우리도 이 해가 가기 전 퇴임 후 30년을 대비하는 인생 이모작 설계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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