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에 문인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전방 DMZ 안보관광지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난생 처음 통일대교를 건너보았지만 ‘통일’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국도 1호선도 경의선도 길이 끊어져 더는 달릴 수가 없었다. 그 너머로 ‘자유의 마을(대성동)’과 ‘평화의 마을(기정동)’이 보였지만 그 또한 자유롭게, 평화롭게 오갈 수가 없었다. 이른바 우리는 비무장지대(DMZ)임에도 마음을 단단히 무장해야했다. 통일대교를 지나 태양의 후예 촬영지를 지나 제 3땅굴을 견학했으나 무장을 풀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休戰)중인 분단된 나라였다.

높이와 폭이 각각 2m, 길이 1,635m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땅굴을 빠져나와 도라전망대를 통해 바라본 북녘 마을은 평화 그 자체였다. 비경 중의 비경이었다. 망원경으로 보지 않아도 송학산이 보이고 개성공단이 보였다. 그 아래 게양대(높이160m)에 나부끼는 커다란 인공기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소 생소한 깃발임에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불현듯 유치환의 전쟁시 한 편이 떠올라 ‘기(旗)’의 의미를 함께 좇는다.

여기 망망한 동해에 다다른/후미진 한 적은 갯마을//자나 새나 푸른 파도의 근심과/외로운 세월에 씻기고 바래져//그 어느 세상부터/생긴 대로 살아온 이 서러운 삶들 위에//어제는 인공기 오늘은 태극기/관언(關焉)할 바 없는 기폭이 나부껴 있다.

-유치환의「기(旗)의 의미」(1951)전문.

「기(旗)의 의미」는 유치환이 6.25전쟁 때 종군작가로 참전했을 때 쓴 시이다. “어제는 인공기 오늘은 태극기”라는 시구(詩句)를 통해 실존적 인간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참상과 함께 한민족의 국기(國旗)가 둘로 나누어지는 기막힌 현실에 대한 증언이다. 더불어 깃발의 나부낌이 결코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분단 60여년이 지난 우리는 최전방 DMZ 안보관광지를 체험하고 있다. 이색적인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유치환의「기(旗)의 의미」를 다시 통독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전쟁과 평화’의 양면성이 깃발로 인식되는 비극적 현장에 놓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푯대 위에 “어제는 인공기, 오늘은 태극기”로 뒤바뀐 채 나부끼던 그날의 상흔을 DMZ 안보관광을 통해 느껴야 한다. 남북분단이 고착화된 가운데 저마다의 의식도 자연히 분리되는 안타까운 현실도 목격한다. 여기에다 DMZ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인 ‘자유의 마을’에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평화의 마을’에는 인공기가 게양되는 현실도 간과할 수가 없다. 우리의 국기가 ‘이념의 푯대 끝’에서 둘로 나누어져야 할 이유가 딱히 있었던가.

‘태극기’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도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에도 변할 수 없는 민족성을 상징한다. 수난이 이어질 때마다 하나로 응집되는 단초로 작용해 숨은 저력을 마음껏 드러낸다. 바람이 불어도 펄럭이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펄럭이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누구보다 먼저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국기(國旗)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긴 대로 살아온” “이 서러운 삶들 위에” 솟아난 푯대 끝에 달린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영원한 상징으로 표상된다.

이를 방증하듯 청마 유치환이 추구한 이념의 푯대 끝에는 언제나 ‘소리없는 아우성’이 들려온다. 일제강점기, 6.25한국전쟁, 4.19 등 민족적 격변기를 두루 겪은 한 시인의 절규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청마시초>, <생명의 서>, <보병과 더불어>, <나는 고독하지 않다> 등 14권의 시집과 수필집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래서일까. 거제도 둔덕골에서는 해마다 “청마문학제”를 개최하고 청마문학연구상을 시상한다. 올해는 9회째로서 9월 3일부터 문학세미나, 백일장, 시화전, 시낭송, 그림그리기 등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린다. 이들 행사의 중심에는 바람이 불어도 나부끼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부끼는 청마의 「깃발」이 있다. 깃발 그 너머로 보이는 태극기는 오늘도 숨은 저력을 과시하듯 청마의 시혼(詩魂)을 불러들인다.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린 깃발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은 언제나 청마시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까닭이다.

가을빛이 익어가는 둔덕골에는 지금 청마꽃들, 코스모스 축제가 한창이다. 더불어 청마문학제도 열린다. 그러니까 방하마을 들판으로 나가 우리 모두 ‘깃발’을 높이 들고 청마시를 한번 낭송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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