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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浪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옥문석 /한국시인협회회원

우리는 지난 세기 질곡(桎梏)의 세월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망국의 설움, 식민(植民)의 설움,전쟁의 애절(哀切: 慘酷). 그로부터 파생된 친일의 프레임(frame). 세기말에 불어닥친 이데올로기 바람도 우리들을 질리게 하고 있습니다. 편가르기가 도드라지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건전하게 굴러 가겠습니까.

이럼에도 이 사회가 지탱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경도(傾倒)된 무리보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발전의 버팀목이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 때 눈에 핏발이 선 채 설치던 그많은 무리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민들이 다수였던 현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최근 상영됐고, 되고 있는 몇 편의 영화로 해서 ‘국뽕’이란 단어를 알았습니다. '국뽕 영화'란 과도한 국가주의를 전파하는 의도로 만든 영화란 뜻이랍니다. '국제시장'과 '연평해전', '명랑', '귀향'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평론가들의 한결같은 시선인 것 같습니다. 지금 상영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도 평자들이 하위 등급으로 치부했습니다. 이럼에도 시민들은 열심히 관람하고 있습니다. 6.25를 다룬 영화를 대놓고 국뽕이라고 낙인을 찍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오도(誤導)가 들통나기 때문이랍니다.

왜 이런 시각이 횡행(橫行)할까요. 이는 통치철학이 정립되지 않은 어설픈 현상에서 기인된 파장일 것입니다. 조지 오웰(Georg Orwell; 1903-1950)은 '공산주의라는 것은 직접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대 흐름이 편향(遍向)되고, 편협(編狹)된 기류가 너무 강해서 안타깝습니다. 역사 앞에 설때 자신이 떳떳한가 하는 성찰(省察)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류에 떠밀려 너도 하니 나도 한다는 서푼어치 철학에 아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필칭 지역사회의 지도자라고 설치는 분들의 사고 앞에서는 자지러집니다. 몇몇 시의원들의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판단에 동랑청마 기념사업회에서 동랑은 빼버렸더군요. 당시의 시대상(時代相)과 그 환경을 제대로 천착(穿鑿)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묻어 납니다.

당시 문학예술인들의 마음을 역지사지(易地思之)했더라면 잘잘못을 구별해 내는 판단이 서지 않았을까요.

동랑에 대한 칼럼이(새거제신문 2015년 5월 15일) 미흡해서 다시 쓰려고 취재를 했습니다.취재중 동랑청마 기념사업회 명칭에서 동랑은 빠진 사실도 알았습니다. 이유를 추적해 보니 시의회 몇몇 의원들의 영향이 있었답니다. 시류에 밀려서라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사업회에 관여했던 사람들이나 관여하고 있는 분들의 입에서는 똑같이 ‘친일’이라는 단어만 되뇌이더군요. 아무런 고뇌도 없이.

식민지 시대 친일의 제일선이 어디였는지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회색지대 일선은 공무원과 순사(巡査)와 교원(敎員)이었습니다.

윤해동(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은 “일제통치의 말단에서 전쟁동원에 직접 참여했던 면장이나 면서기 또는 말단 경찰이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황국신민화 교육을 담당하면서 '일본인', '황국신민'을 양성하고 민족성 말살에 참여했던 국민학교 교사들은 일본군의 한국인 장교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금융조합, 농회, 각종 영단 등에 근무하고 있던 자들은 왜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이처럼 주체와 대상이 모호하다는 문제를 애초에 그 본질로서 내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동랑의 친일. 이제는 이 단어로 재단하기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기념사업회나 거제시가 이제는 동랑을 가둬둘 것이 아니라 ‘공과를 분리하는 작업’을 했으면 합니다. 유민영은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동랑 유치진이 있다고 했습니다.(한편으로 이 분은 동랑의 고향을 거제라 했다가 통영이라고 했으나 동랑은 그의 자서전에서 한일합방되던 1910년 다섯살 때 둔덕에서 통영으로 이주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은 민족주의가 주류였습니다. 육당이 조선사 편수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조선의 역사를 왜곡시키려는 총독부의 책략을 막기 위한 것임을 김재순(어느 노정객과의 시간여행: 기파랑)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당의 고사통(故社通: 1943. 삼중당서점)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목검으로 피멍이 들도록 맞았답니다. 그 책은 친일 책이 아니랍니다.

육당이 반미특위에서 제출한 자열서(自列書)에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사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록과 그로써 얻은 학구상의 편익을 필요로 하였다는 이외의 다른 말은 하고 싶지않다”고 했습니다. 우암은 이 내용이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학구적 양심의 소리로 들렸다고 합니다.

춘원의 딸 이정화(미국 거주)는 고국 방문길에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더군요.(2014년 10월13일) 그는 아버지가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수양동우회사건이 전환점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춘원의 저변에는 민족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인터뷰를 보고 다음날 김우전(전 광복회 회장)은 조선일보를 찾아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춘원의 연설을 들으니 그가 '조선민족을 위해서 나가라'고 했답니다. 그는 그 연설을 들으면서 학병을 종용하러 온 것은 분명한데 조선민족의 생존을 고민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동랑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내가 예술가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곤 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예술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방황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어나서 청장년을 보낼 때까지 온통 피지배 민족으로서 또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피지배자의 공포는 인간에 대한 공포이고 전쟁공포도 마찬가지다.”

그가 쓴 세 편의 희곡 가운데 북진대가 친일색채가 도드라진다고 박영정은 지적합니다. 그렇다고 친일 연극활동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랍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1931년) 극예술 연극회를 조직, 신극 운동을 전개(토막, 소, 버드나무, 동리에 선 풍경 등)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서 고통받고 신음(呻吟)하던 궁핍한 농촌 현실을 리얼리즘적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이처럼 우리 희곡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럼에도 1941년 이후 심약한 그는 일제탄압으로 '북진대'와 같은 친일 극을 쓰면서 친일이라는 오명을 남긴 것입니다. 이제 우리 후대가 해야할 일은 한쪽만 보지말자는 것입니다. 적합한 단어가 공칠과삼(功七過三)의 문화인 것입니다. 덩샤오핑이 마오를 평한 말입니다. 동랑이 이 나라 희곡사의 거대한 발자취를 지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그가 태어난 거제에서 동랑을 재조명해야 하는 함의가 시대의 요구일 것입니다. 얄팍한 식견으로 그를 매도하기에는 버거운 현실입니다. 동랑청마기념사업회는 친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움츠러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담대하게 시대의 담론으로 채택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식견이 얕은 정치인의 화두나 이념에 경도된 시민단체에 농락당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만주에 갈 여력이 있으면 이 문제의 해법을 강구했으면 합니다. 친일 때문에란 말에 저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거제의 문화계도 동랑이란 담론(談論)을 밀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묻혀둘 담론이 아닙니다. 일각에서는 생가의 푯말문제와 기념회 명칭문제도 복원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 차원에서도 깊은 배려가 뒤따랐으면 합니다. 이만한 문화콘텐츠를 사장할 것입니까? 문화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가 재난인 시대, 번번함이 미덕이 된 이 사회에서 동랑청마 기념사업회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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