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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류의 중생들바른정법 바른인연(40)
▲ 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진리에 들어오는 순서를 크게 세 부류로 나누고 있고, 그 세 가지는 장아함경(長阿含經)에 의거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사정취(邪定聚)의 중생들이다.
절에 오는 이들 중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부처를 잘 아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이들이다.

부처님이 막상 자기 집을 방문하게 되면 도리어 “누구냐?” 고 반문하는 부류들이다. “내가 너희들이 불철주야 불러대던 부처이다.” 라고 하면 “거짓말 하지 말라.” 고 쫓아내고도 남을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 비불교적 행위와 기복 신앙에 길들여진 그런 사람들이 부처의 집에 억지로 잡아와 두어도 마구니의 소굴로 바삐 되돌아 가버리는 사도(邪道)의 중생들이다.

그런 중생들이 유혹과 요행을 바라는 수많은 종교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도록 그 토양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러고는 시간이 흘러 그 종교에 의해 파멸되어 버린다. 또 다른 신비를 조장한 가르침을 신봉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언제나 무지에 빠뜨리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또 다시 괴로워한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기 그지없으므로 길이 괴로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들어맞는 불쌍한 중생들이다. 그렇게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전생부터 바른 선지식을 만난 시절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정취(不定聚)의 중생들이다.
때가 되어 필요할 때는 부처님의 위대한 위신력을 믿고 매달리다가도 자기가 살만하게 되면 부처님의 은덕을 바로 잊어버리고 사는 반거충이 불교신자들이다.

옛 말에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맘이 틀리다고 하는 얘기가 있지 않은가? 그들은 소풍가는 것처럼 절에 다니면서도 그들이 부처님께 무엇을 기대할 때는 무서울 정도로 매몰차게 요구한다.

예로 입시철에 발원문에 고득점에 합격시켜 달라고 사진까지 붙여서 들이밀지 않는가? 그러다 원하던 그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모든 원성을 부처님께 돌려버리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시쳇말로 기도빨이 안 받는 곳이라나?

그들은 부처님을 기대의 대상자로 손익 계산을 정확히 따지는 사람들이다. 돈이 들어오는 일이 있을 때는 절대로 절에 나오지 않는다. 또 그들은 계모임이 있을 때도 그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해 버리기 일쑤이고, 오랜만에 친구가 왔다고 하면 그 역시 친구를 부처님보다 앞서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러면서 불교를 믿는다고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니지만 정작 불교를 제대로 알기 위해 경전반이나 공부방을 만들어서 공부하자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하며 오만핑계를 다 대면서 다음 기회로 미루기가 일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를 수밖에 없다. 다만, 피상적인 외적 불교만이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전부이다. 철저히 기복에 길들여져 있어 정진과 기도를 하다가도 자기들의 세속 일이 바쁘면 그것들을 일시에 뒤로 미루기를 밥 먹듯이 하는 이들이다.

서울 절에 있을 때 부고가 생겨서 절에 못 나오는 신도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평상시에 얼마나 바른 공부와 수행을 못하고 있는 가를 알고자 하면 지금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바로 표시가 나는 것이다. 제대로 공부하였다면 우선 번개같이 절에 와서 그 죽은 영혼(영가님)을 위해 기도를 해 주어야만 불교인다운 처세가 아닌가? 그래야 만이 죽은 영가가 살아생전에 제대로 된 친구 하나를 멋지게 사귀었다고 흡족해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직언했다. 그러면 그는 유족들 얼굴 때문에 급히 가 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한다.

그러면 그때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아니 평상시에 절에 열심히 다닌다는 것을 그 사람들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주었어야지 도대체 무엇을 하며 같이 다녔습니까? 고작 술이나 먹고, 계모임이나 하고, 같이 놀러 다니는 정도의 벗이었느냐?” 고 묻는다.

친구가 결혼식을 올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절에 와서 부처님께 그들의 장도를 기원해 주어야 하고, 회갑 등 행사 때도 감사의 기도가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절에 와야 하는 날 명색이 불교신자가 세속의 일 때문에 1순위에서 2순위, 3순위로 미루어지면서 불참해야 되는가 말이다.

이 세상에서 정진만큼 더 바쁜 일이 또 어디 있을 수 있는가?
세수를 하고 외출을 하듯이 마음을 정갈하게 하지 않고, 어찌 세속에 나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가지 말라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강조한다. 당신이 진정 불자라면 절에 오는 날은 죽을 자유조차 없다고 하고 있다.

죽고 싶으면 다른 날을 받아 죽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항상 부처님 전에 예를 올리면서 고하고, 일을 하는 게 순서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불교의식이 거행되는 재일과 행사, 또는 기도와 불사에는 언제나 분수에 따라 기꺼이 동참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확실하게 불교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니다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상태로 머무르고 있다.

그들은 결국 어떤 스승 (종교지도자)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지도원리에 의해 사성취(邪定聚)나 정정취(正定聚)로 나아가느냐가 정해지는 중간의 사람들인 것이다.

셋째는 정정취(正定聚)의 중생들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지난 생에 바른 선지식의 시절 인연이 있어 이생에서도 바른 선지식을 만나 불교의 바른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확고하게 그들의 인생관이 정립되어 있는 확실한 신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기 2560년 말법시대에 실제 이런 불자는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을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정통 불교신자들이다.

그들은 차라리 자기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까지 부처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하는 비불교적인 행위 (사주, 부적, 인등, 삼재, 성지순례 등등...)를 배제하고 오로지 부처님 말씀만을 공부하고 실천 수행하는 정법의 수호자들이다.

부처님 입멸 후 용수를 비롯하여 옛 조사님들이 부처님을 지키려고 외도들의 위협에 목숨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꿈쩍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 바른 가르침을 심지로 삼는 부동의 불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절세의 미인이 유혹해 와도 눈썹하나 꿈틀하지 않는 견고부동한 수행의 길에 올라 선 신자들이다. 그런 신자들 때문에 이 땅에 아직도 불교가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불자들이여!
바른 선지식을 만나 부처님의 정법으로 성불하여지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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