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공곶이’는 내리막으로 시작된다. 가파른 내리막의 단상이 여느 길과 달라,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찾는 곳이다. 그 길로 가면, 동백나무 터널로 돌계단이 신기루처럼 펼쳐져 내리막의 진수를 단단히 만끽할 수 있다. 내려가다가 하늘이 보이지 않더라도 뒤돌아보지 말아야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유의 공간이 그만큼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는 자세를 한껏 낮추고 내려가야 한다. 돌계단을 지르밟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리막의 끝이 보이고, 막막하던 하늘도 다시 보이기 마련이다. ‘내리막’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어지는 비탈진 곳이다. 공곶이 가는 길은 그런 내리막의 연속이니, 발길 닿는 곳곳마다 고개를 숙여야 한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수선화, 종려나무, 팔손이 등등 두루두루 만날 수가 있다. 하늘이 바다와 이마를 맞대며 수평선을 그리는 것도 내려가기 위함일 것이다.

내리막길에서도 힘에 부친다면, 쉬엄쉬엄 쉬었다 가야 한다. 터널 속 울타리사이로 붉게 피어난 동백꽃의 숨은 저력이 무엇인지 물어봐야 한다. 한 겨울에도 엄동설한을 뚫고 옹골차게 핀 꽃이니만큼 그 나름의 해법이 있지 않겠는가. 조선해양산업의 장기불황으로, 한겨울보다 더한 혹한기를 맞은 거제지역 사람들에게는 예사로운 꽃이 아닌 게 분명하다.

내려갈수록 어둑어둑해지는 내리막이라면, 돌계단이 333개인지, 몇 개인지 헤아리지 말자. 터널 길이가 200미터인지, 몇 미터인지도 헤아리지 말자. 그러나 공곶이 주인집 헛간에 있는 호미, 삽, 괭이만큼은 몇 개가 되더라도 헤아려야 한다. 층층이 돌계단 길을 만들고, 노란 수선화 꽃을 피운 사람이 흘린 땀의 가치를 먼저 헤아려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야만 산비탈을 개간해 사시사철 꽃을 피운 그 사람의 문드러진 손톱의 아픔도 헤아릴 수가 있다. 흙에 닳은 손톱이고 돌에 닳은 손톱이니, 손과 손톱의 경계가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만 피어나는 수선화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천으로 피어난 노란 수선화가 사람과 자연과의 경계를 소리 없이 허물고 있다.

동백나무 터널 밖으로 나오면, 두갈래 길이 보인다. 왼쪽으로 가면 공곶마을 외딴 집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몽돌담장과 함께 파란 바다가 보인다. 집에서도 보이는 바다이고, 바다에서도 보이는 집이다. 그 곳이 수선화 천국이니만큼 밭뙈기마다 노란 희망이 넘실거린다. 종려나무, 동백나무, 조팝나무, 천리향, 만리향 등 50여종의 식물들도 꽃향기를 더하며 뿌리를 내린 지 벌써 오래다.

꽃구경을 하러 왔다면, 어느 쪽으로 가든지 상관없다. 그렇지만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왼쪽으로 가야 한다. 입장료가 없다고 공곶이 주인집을 그냥 스쳐가면 안 된다. 인기척이라도 살펴야 한다. 인기척이 없다면, 밭뙈기 어딘가에 쭈그리고 앉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터, 묵례라도 해야 할 일이다.

공곶이는 원시림이 살아있는 거제도 8경 중 마지막 비경이다. 예구마을 입구에서 20분쯤 올라가면, 오솔길로 이어지는 내리막이니 산책하기가 좋다. 알음알음으로 찾던 지난날과 달리 요즘은 알려질 대로 알려져, 무리지어 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지천으로 노랗게 피어난 수선화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계단식 다랭이 농장(4만 5천 평)을 별천지로 만든 노부부의 오랜 손님들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공곶이 내리막길은 팔순을 한참 지난 노부부가 46년째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 집 앞마당에는 노랑, 파랑, 빨강 등등 원색의 색감이 살아있는 터라 살맛이 절로 난다. 키 작은 수선화와 키 큰 종려나무가 서로 하나로 어우러져, 비경의 극치를 보여준다. 군무(群舞)가 따로 없고, 보이는 것만으로도 절창(絶唱)이다. 내리막의 끝에도 보이는 하늘이니, 온기가 절로 느껴진다. 길은 다시 오르막이다. 내리막의 끝은 시작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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