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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 바른정법 바른인연(39)

“초기 수행자들이여! 욕심이 많은 이들은 얻고자 하는 이익이 많기 때문에 그에 수반되는 고통과 괴로움이 많을 것이나, 욕심이 적은 이들은 얻고자 하는 욕망이 적기 때문에 그만큼 근심과 우환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니라.”

다만 욕심을 적게 가지고 있어도 그 만큼의 큰 공덕이 깃드는데 거기다가 수행까지 마땅히 덧붙인다면 어찌 작은 욕심으로 일어나는 공덕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 모두의 공유물이다. 어느 누구라도 이 공유물을 사사롭게 챙겨가질 수는 없다. 그러면 중생세계의 기본 틀이 무너져 버린다.

법구경(法句經)에서 “탐욕이 걱정을 낳고, 또 두려움도 낳나니 탐욕이 없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걱정하겠으리요?” 라고 하셨고, 백연경(百緣經)에서는 탐욕으로 부귀를 구할 때에는 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고, 그것을 얻고 난 뒤에는 지키느라고 불철주야 노심초사해야 하고, 그러다 뒤에 그것을 상실하면 다시 괴로움을 겪어야 되니 지나친 물욕(物慾)을 경계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따르지 않게 될 때 서로 간에 투쟁이 시작될 것이고, 그것을 잃은 자는 찾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고, 가지고 있는 자는 절대 내놓을 수가 없다고 버틸 때 소요가 일어날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온갖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면 탐욕이 그 근원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잃은 것은 바로 주인인 남에게 돌아간 것인데도 그들은 그것이 본래부터 자기 소유였던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다시 또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되찾아오려고 벼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그 순수한 공유물은 없어지고 만다. 모두 다 이제 그것들이 원래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보니 급기야 쌍방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제 정말로 모두 다 잃게 되어 버렸다.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이제 서로 빼앗으려고 한다.
이때 성직자는 이 위험에 처한 세상을 빨리 구해주어야 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며, 불평등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을 바로 잡아 불안전한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보살들은 중생들 간에 형평성이 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을 잘 다독거려 화합시킨다”고 하신 말씀처럼 수행자는 그들에게 공평 정대하게 모든 것을 재분배 해 주어 모든 중생들이 이 사바세계를 다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이제 더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대승보살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이고, 신성한 책무이다.

많이 가진 이들에게 적게 가진 자들을 위해 골고루 나눠주도록 방편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때 그들은 공유물의 이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빼앗긴 자들의 울분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도리어 거만과 허세를 부리려고 한다. 그렇게 될 때 수행자는 어쩔 수 없이 형평성에 맞는 방안을 가지고 중재인 노릇을 해야 할 수 밖에 없다.

이때 수행자는 과연 누구를 위해 불공을 올려 주어야 하는가? 시주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이제까지 부처님의 은덕을 입히려고 기도를 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불공은 하나의 보석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현실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그들을 위해 무병장수하라고 그 탐욕을 감싸 안아 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중생 모두가 다 평안하라고 기도해 왔다. 누구를 위한 기도였던가? 가진 자는 우리의 기도가 없이도 부유한데도 우리는 그들 쪽에 언제나 항상 서 있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힘없는 사람들의 곁에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출가한 수행자가 행하여야 할 기본 덕행이 아닌가?

가진 자에게는 이제까지 이러한 계산들을 쌓아 나갈 때 못가진 자에게서 들어 온 온갖 원성들을 참회시키고, 그것을 그들에게 회향해야 된다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그것 보다 더 값지고 더 고귀한 지혜를 분명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주는 한 집안이고, 중생 모두는 한 가족이라는 윤회의 법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참다운 인생의 가치관을 정확히 가르치고, 그것을 지견하는 지혜를 갖도록 열심히 도와주어야 한다. 그 지혜를 제대로 발휘할 때 그들은 물질보다도 더 굉장한 마음의 부귀와 끝없는 공덕을 영원히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중생의 공동재산을 개인적으로 끌어 와 아름답게 시주하고도 그들은 자기의 잃어버린 마음을 멋지게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도 아까워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상태에서 그들은 신성한 수행자를 만나 엄청난 폭리를 취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이 사이에서 사사로운 욕심을 내게 되면 문제는 현격하게 달라진다. 중생세계는 중생세계대로 아귀가 맞지 않아 언제나 삐걱거리게 되고,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탐욕에 젖어 들어 균형을 맞추어 주지 못하다 보니 세상은 오탁악세(五濁惡世)의 극치로 치달아 버리고 만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결과의 참담한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 무량문비밀지경(無量門秘密持經)에서는 “지혜로운 수행자는 결코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우리 출가자들에게 탐욕의 폐해(弊害)를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죽이는 세 가지 독약 가운데 탐욕의 독을 첫 번째로 꼽으셨다.

법집요송경(法集要頌經)에서는 “욕심을 지니고서는 해탈하기 어려운 것이다. 욕심으로 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출가라 할 수 있다. 욕심을 내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 탐욕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 욕심이 많다는 것은 바로 괴로움이 많다는 것이다. 생사의 고통은 바로 탐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욕심없이 담담하게 살아가면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시면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모든 수행의 발판이 된다고 일러주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중생의 것을 일시적으로 갖게 되었을 때에는 지체없이 그것을 복덕(福德)으로 바꾸도록 모두 다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가장 안전하고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된다. 그러나 그 시기를 머뭇거리다가 일단 놓치게 되면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되어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사람들은 응당히 보시를 해야 될 것이다.

고려 때 야운(野雲)스님께서 “올 때도 빈손으로 왔고,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간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림없는 소리이다. 사람들은 사구절로 되어 있는 다음 두 줄의 게송을 놓치고 있다. 올 때는 분명히 빈손으로 왔지마는 갈 때에는 절대로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탐욕으로 빚어진 업장(業障)을 이제 어깨가 휘어질 정도로 가득 짊어지고 가기 때문이다. “온갖 것들을 갖고 가지 못하지마는 오직 죄업(罪業) 만이 악착 같이 따라 붙어간다”고 한 것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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