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문화마당
소와 목동의 화가 여산 양달석을 그리며김정희 /거제문예재단 경영지원부장

3월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 올리는 벚꽃나무는 올해도 예술회관의 야외공연장 주변을 화사하게 채색하고 있다. 이 봄날 거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는 소와 목동의 화가 ‘여산 양달석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대한민국 100대 화가에 선정된 작고예술인으로써의 첫 전시회로 그 의미는 대단하다고 하겠다.

구한말인 1908년 사등면 사등리 성내에서 한의사의 4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양화백은 미술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1세 때인 진주공립농업학교 3학년 때다. 그 당시 오사카(대판)신문 주최 전일본중등학교 미술 전람회에 “농가”를 출품해 특선을 받게 되었다.

어둡고 가난한 상황 속에서 한평생을 서민 화가로 향토적 주제의 형상만을 고집해 온 양화백. 그는 1세대 부산, 경남을 대표하던 서양화가로 변화의 가치를 으뜸으로 치는 지적 풍토와는 무관하게 가난 속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농촌의 어릴 적 체험을 화폭에 옮겨 놓은 민중작가였다.

1994년 필자가 거제예총 사무국장으로 있을 당시 고 양달석 화백을 비롯한 지역출신의 작고예술인 추모를 위한 “거제 문화예술의 위대한 선각자들”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그때 선정한 지역 예술계의 대표적인 선각자 명단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청마 유치환 선생은 거제의 자랑이자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시인이다. ‘의지의 시인’ ‘극기의 시인’ 그것은 바로 청마 유치환선생의 詩 세계관이자 그의 인생이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은 생전에 거의 천편에 가까운 시를 썼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과 극기심만이 자신을 이기는 인생의 승리자라는 신념으로 삶을 사신 세계적인 시인이다.

동방의 명필이라고도 하는 성파선생은 평생 추사체를 추구하셨다. 현재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는 진주 촉석루의 현판을 비롯하여 밀양 영남루의 현판 등이 있다. 특히 거제시 동부면 사무소에 있는 ‘一心奉公’이라는 작품은 생동감이 넘치는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愛鄕의 선구자로 옹골찬 선비 藝人이라고 칭하는 무원 김기호 선생은 생전에 ‘풍란’이라는 시조집 한권을 남기셨다.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조시인이기에 앞서 인격이란 藝道에 앞서는 것이라고 신념처럼 생각하고 실천하신 선비의 삶을 사셨다. 하청에 교육기관을 설립하신 거제의 페스탈로치로 존경 받는 분이시다.

향파 김기용 선생은 난이 있었기에 반세기가 넘도록 고향을 지킬 수 있었다며 난을 연구하는 등 거제를 애란의 고장으로 만드신 진정한 애란인 이시다.
소산 홍준오 선생은 한국 시조 문단에서 40여 년 가까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마음으로 시조의 본령을 지키면서 우리 언어의 조형미를 극대화시킨 대표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윤의도 선생은 사진작가로써 향토문화와 관광홍보에 앞장 선 진정한 문화예술인이셨다고 한다. 또한 천주교 순교자의 후손으로 향토를 위해 평생을 몸바쳐온 분이기도 하다.

작고 예술인 추모를 위한 세미나가 있고 얼마 후 문화관광부에서 ‘미술의 해’을 선포하면서 한국 미술계 100대 화가로 선정된 여산(故)양달석 화백 표지석을 거제시 사등면에 세우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화백은 경남권에서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게 되었으며 거제예총에서는 “여산 양달석 화백 그림비 건립위원회”를 결성하여 사곡 삼거리 소공원에 그림비 제막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때 제막식 기념으로 양달석 화백 기념전시회를 개최할려고 준비를 하다가 예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난관으로 중도에 포기한 기억이 있다.

양화백의 작품세계는 청색 주조에 목동이 피리를 불며 소들이 뒷동산이나 시냇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추상이니 전위예술이니 하는 미술 사조의 유행이 거칠게 화단을 몰아칠 때도 양화백은 고지식할 만큼 한 가지 소재와 화풍에만 일관하는 소박한 자기 언어를 지닌 예술인이었다고 한다. 50년 동안 줄곤 2,600여 점의 그림 속에는 자신이 체험한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가난이란 삶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 데서 연유된 것이리라.

양화백은 1975년 국제신문에 연재된 ‘청춘은 아름다워라’ 의 제하 나의 비망록에서 “목동은 내 슬픈 날의 자화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그리는 포근하고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가 당시 세파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자기극복, 즉 구원의 세계였다고 술회했다.

1962년 제정된 경상남도 문화상을 수상한 양화백은 70년 이후부터는 고혈압과의 투병생활을 계속하면서도 그림그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주위 미술애호가들의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청마의 본향이 거제라는 것이 알려진 후 청마가 태어난 둔덕골에 조성된 청마기념관은 전국의 대표적인 문학관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국도 14호선에 인접해 있는 사등면 성내마을이 한국 1세대 서양화가 양달석 화백의 본향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이런 때에 거제시문화예술재단에서 올해 주요 전시사업으로 개최한 “여산 (故)양달석 특별전”은 분명 정신문화의 표상인 그의 예술세계를 기리는 사업으로 지역 예술계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때맞춰 결성된 “여산 양달석 기념사업회”에서는 양화백의 예술세계를 지역에 널리 알리는 사업과 그를 밀도 있게 조명하는 작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멀지 않는 미래에 여산 양달석 미술관 등 거제를 대표하는 작고예술인들의 심오한 예술성을 느낄 수 있는 기념관이 조성되어 지역민 누구나 ‘예술을 꿈꾸며 문화를 즐기는’ 날이 오리라 기대해 본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거제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