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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멈췄다네 번째 마을-사등면 견내량 마을


빛바랜 마을 풍경
“전하! 전하!”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궁에서 쫓겨난 고려 제18대 왕 ‘의종’이 거제를 향해 바다를 건널 때 통영 뭍에 남아 있던 신하들이 울부짖던 소리다.

‘전하(殿下)’가 건넜다고 해 이 해협을 ‘전하도(殿下渡)’라 불렀고, 그 뒤 견하도(見下渡)에서 오늘날 부르는 견내량(見乃梁)으로 바뀌었다는 게 사등면 덕호리 ‘견내량’ 마을의 유래다.

이 마을은 행정 지명보다 ‘대교’라고 불린다. 구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 일대는 아울러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버스 정류장도 마을 이름을 쓰지 않고 ‘대교’나 ‘오량초’를 쓰며, 상가 이름 역시 그렇다.

견내량 마을은 구거제대교를 경계로 신촌마을과 이웃한다. 신·구 두 대교 사이에 끼인 마을이 견내량이다.

요즘은 해가 길어져 여유를 두고 정오가 지나서야 마을을 찾았다. 햇살이 노릇노릇한 게 금세라도 해가 질 것 같은데 서쪽 끝 마을은 제법 낮이 길었다.

마을 풍경은 예스럽다. 현대 건물은 끽해야 성처럼 지은 마을 회관과 정원을 멋지게 꾸민 어느 주택, 그리고 최근에 차린 듯한 한 무술 도장 정도다.

건물 대부분이 80년대 출생인 기자가 어렸을 때 봤음직 한 모습들이다. 빨간 벽돌집도 있고,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남겨둔 폐가도 더러 있다.

해안가 널찍한 길에는 키 작은 건물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다. 담장과 대문을 두른 집도 있고, 그런 것 없이 길에서 바로 드나들 수 있는 미닫이문이 전부인 집도 있다.

이는 한때 가게였던 것 같은데 나중에 만난 박철만(63) 견내량 이장에 따르면 이 길은 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마이크로버스나 큰 차가 다니던 신작로였다고 한다. 짐작건대 이 길을 중심으로 상가(商街)가 조성됐던 것 같다.

마을엔 오량초등학교가 있어 지금껏 취재한 마을과는 달리 골목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넘친다.

울퉁불퉁한 골목길에서 자전거 탄 무리가 추격전을 벌이기도 하고, 세발자전거를 탄 꼬마가 내리막길을 내달리며 볼때기가 터질세라 깔깔거린다. 뒤따라 쫓아오던 아이 엄마는 평지에 와서야 아이를 붙잡고 나무란다.

앞서 말한 무술 도장은 입구에 트램펄린을 설치해 놨다. 방방 뛰며 노는 아이들은 집에 갈 생각이 없는지 이곳을 여러 번 지나쳐도 그 아이가 그 아이다.

▲상가 이름에 대부분 '대교'를 썼다.

▲대교 개통 전 마이크로버스가 다녔다는 큰 길
▲오량초등학교
▲초교가 있어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평화로운 낮을 보내고 있는 견공
▲저녁 무렵 노을 경관이 뛰어난 견내량 해협

거제 관문의 역사
견내량에 땅거미가 질 무렵 박철만 이장을 만났다. 갑작스러운 인터뷰 요청에 고현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러나 막상 마을 소개할 거리가 별로 없다고 했다. 워낙 역사가 깊은 마을이라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했다.

그 역사란 의종이 첫발은 내디딘 거제땅이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대첩을 승리로 이끈 군사 요충지였다. 현대에 와서는 거제대교가 놓이면서 육지를 잇는 관문이 됐다.

이 정도는 사등면지에도 기록돼 있으니 박 이장이 기억하는 옛 모습을 그려 달라고 했다. 그제야 그의 눈동자가 그윽한 빛을 띠었다.

우리는 먼저 견내량 해협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간 방파제로 갔다. 거제대교의 절반에 이를 만한 거리에 이르자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박 이장이 젊었을 때는 이 방파제도 없었다. 마을은 바다와 맞닿은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었고, 초가집 5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견내량 말고는 근처에 마을이 없고 대부분 밭이었다.

전형적인 반농반어였으나, 지금은 어업이 대부분이다. 굴 양식과 가공이 활발하고, 물이 빠지면 바지락도 캔다. 예전엔 잘피(바다풀의 종류) 사이로 팔뚝만 한 해삼을 줍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마을에 제대로 된 하수처리장이 없어 생활하수 대부분이 바다로 쏟아진단다. 물고기며, 조개며, 해삼이며 눈에 띄게 줄었는데 바다 오염을 원인으로 꼽고 있다. 이번에 새로 취임한 박 이장은 마을하수처리장 조성을 임기 내 과업으로 삼고 있다.

거제대교가 1965년 착공해 1971년 개통했다. 개통과 함께 규모가 꽤 큰 조미료 공장이 마을에 들어섰다. 여공(女工) 수백 명이 일하면서 마을은 활력을 띠었다.

아직도 건물은 남아있지만, 안은 텅텅 비었다고 한다. 사업은 철수한 지 오래고, 용지를 팔려는 모양이란다. 특이한 문양을 한 철문은 이날도 반쯤 열려 있었다.

대교 개통은 마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전에는 육지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기에 배를 이용한 물자와 사람 이동이 활발했다.

그러다가 마을 밖에 육지를 잇는 다리가 놓이자 통영을 오가는 버스까지 생겼다. 한 독지가가 터를 기증해 버스 여러 대가 머물 수 있는 정류장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사등면 서부 지역과 둔덕면 일대는 통영 생활권에 가까워졌다. 현재 거제 시내버스는 통영을 가지 않지만, 통영 시내버스는 거제대교를 넘어 주민을 태워 나르고 있다.

그러면서 대교 인근에 사람이 붐비게 됐고, 식당과 상가가 들어서면서 꽤 번화한 마을이 조성됐다. 지금의 ‘신촌(新村)’ 마을이다. 신촌은 1982년 거제군 조례에 따라 견내량에서 분리됐다.

▲마을을 가리키는 박철만 이장
▲대교 개통과 함께 가동됐다는 조미료 공장. 지금은 사업을 접었다.

흐르지 않는 역사
그 뒤 거제-통영간 교통량이 많아져 1999년 새로운 대교가 견내량 마을에 놓였다. 그러나 마을은 큰 발전은 이루지 못했다.

반면 바다 맞은편 통영은 대교 관문에 견내량 해협과 거제대교를 경관 삼은 관광시설이 들어서고, 그 아래에는 아파트와 새집들이 우후죽순 자리 잡았다.

이에 견내량 주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동쪽을 보고 있는 통영과 달리 견내량은 서쪽을 보고 있어 해가 길고, 노을이 물든 견내량 경관도 뛰어나다.

그러나 이 일대는 계획관리지역으로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10만㎡의 땅이 확보되지 않는 한 건물 높이를 4층으로 제한하고 있다.

박 이장은 “최고의 조망과 교통 입지에 반해 수많은 건설 업체에서 아파트를 짓겠다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이 같은 장애물 때문에 매번 실망하고 돌아갔다”면서 “행정적 제한 때문에 더는 개발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박 이장은 임기 내에 반드시 그 초석을 다져놓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견내량 마을은 큰 자랑이던 역사가 세월을 따라가지 못하고 멈춘 지 오래다. 거제 첫 땅이라지만 눈에 띄지 않는 빛바랜 마을이다. 어째서 통영은 되고, 거제는 안 되는지 자각(自覺)이 필요한 때다.
▲다리 건너편 통영은 관광시설과 아파트, 주택이 들어섰다.
▲견내량은 개발 제한 때문에 옛모습 그대로다.



조행성 기자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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