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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일여(禪農一如)의 수행이란?- 바른정법 바른인연(36)
▲ 도안스님/연등사 주지

당나라 대력 연간 (776-779)에 지어진 향사암(鄕寺岩)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중창을 거듭한 결과 총림이 되었고, 이후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가 입적한 뒤에는 한때 시호를 따라 대지성수선사(大智聖羞禪寺)라는 편액을 내걸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승속의 불제자들은 끝내 절 이름을 백장사로 다시 돌려놓았다.
백장사가 가장 융성했을 때는 명.청 시대였고, 명홍무 연간에는 3사(寺)5묘(廟)48암자라고 할 만큼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백장회해선사는 복주(福州) 장락(長樂) 출신으로 조상은 태원(太原)의 왕(王)씨로서 영가(永嘉)의 상란(喪亂)을 피해 이주한 가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사가어록에서는 왕씨라 하고, 조당집에는 황(黃)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 선사께서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가곤 했다.
“어머니 저게 무엇입니까?” “부처님이시다.” “생김새가 사람 같아서 저와 다르지 않습니다. 뒷날 저도 부처가 되겠습니다.”
스님은 약산 유엄선사의 삭발 스승인 서산 혜조 화상에게 머리를 깎고 형산 법조 율사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비구계를 받고 난 뒤 “장차 미망(迷妄)의 근원을 씻어내려면 반드시 바른 법의 바다 가운데서 노닐어야 하거늘 어찌 오로지 마음을 깨치는 것 뿐이랴?” 또한 “말로 따지어 가르치는 것도 의지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이후 스님은 안휘성 여강으로 가서 수년에 걸쳐 부차사(浮?寺)의 장경(藏經)을 두루 열람한 뒤 마조대사 문하로 들어가 인가를 받았다.

마조대사를 만난 백장이 깊이 깨달아 인가를 받는 선화(禪話)다.
스님이 마조대사를 모시고 가다가 날아가는 들오리 떼를 보았는데 그때 마조대사가 물으셨다.
“이것이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조대사께서 갑자기 스님의 코를 잡아 인정사정없이 비틀었다.
스님은 “아야!”하고 비명을 질렀다. “날아가 버렸다니...... 어디 다시 말해보거라.” 마조의 날벼락에 스님은 문득 깨달았다.

시자방으로 들어간 스님은 목놓아 울었다. 걱정이 된 한 스님이 물었다. “부모님 생각에 우는 겁니까?” 백장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에게 욕을 먹었군요.” 백장스님은 다시 또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 우는 겁니까?” “스님께서 제 코를 사정없이 비틀어 아파서 우는 겁니다.” “무슨 일로 도인의 노여움을 샀습니까?” “직접 스님께 여쭈어보시지요.”

그는 곧 마조에게로 갔다.
“회해시자는 무슨 일로 스님께 코를 잡히고 나서 우는 겁니까?” “회해가 알 것이니 그에게 물어 보거라.”
할수없이 그는 백장회해 스님에게 와 말했다. “스님께서는 회해스님이 더 잘 알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때 백장스님이 큰 소리로 웃어젖혔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아까는 울더니 지금은 왜 웃습니까?” “맞습니다. 아까는 울었고, 지금은 웃고 있습니다.”

다음날 마조대사가 법문을 하려고 법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백장스님은 대중이 보는 가운데 좌복을 개켜 치웠고, 마조는 방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마조가 뒤따라 간 백장스님에게 물었다.
“설법도 시작하기 전에 왜 좌복을 치웠는가?” “어제 스님께서 제 코를 비틀어 아파서 혼났습니다.” “어제 너는 어디에다 마음을 두고 있었느냐?” “오늘은 코가 아프지 않습니다.” “오늘 일을 잘 알고 있군.”
사가어록에서는 이 부분이 “어제의 일을 깊이 밝혔구나”라고 나온다.

백장의 들오리 (百丈野鴨)란 공안이 탄생하게 된다.
백장스님이 신도들의 요청으로 대웅산으로 들어가 주석하기 시작한 때는 마조대사가 입적한 뒤였다. 대웅산의 바위와 묏부리가 깎아지른 듯 높았으므로 스님을 백장(百丈)이라 불렀고, 머물지 한 달이 못되어 대중이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고족(高足)은 위산영우(?山靈祐) 황벽희운(黃檗希運)이었다.
백장스님이 선종사(禪宗史)에 남긴 최대의 족적은 선원청규(禪苑淸規)의 제정이다. 이로 인해 선사와 율사 도량이 구분되어 발전했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농선(農禪)의 보청정신이 확립되어 황실이나 귀족의 후원, 혹은 탁발에 의지하지 않고 대중이 스스로 논밭을 개간하여 자립의 기반을 다졌던 것이다.

“널리 청한다”는 보청(普請)은 운력처럼 누구나 예외없이 노동에 참여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백장선(百丈禪)의 요체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출가수행자들은 어떠한가?
실제로 백장스님은 80세가 넘어서도 농기구를 들고 솔선수범하여 논밭으로 나가 자작을 했다. 80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노장(老長)스님은 방장실에서 쉬지 않고 참가하니 시자는 물론 전 대중이 스님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시자가 스님의 호미와 괭이를 감추었는데, 노장스님은 “내가 덕(德)이 없어 이러한 것이다. 내가 아직 육신이 멀쩡한데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나?” 하시며 이리저리 농기구를 찾다가 보이지 않자 그날부터 공양간에 나가지 않으셨다. 노스님께서 식음을 끊고 버티자 결국 시자스님이 농기구를 도로 내어드리니 그제서야 공양을 하셨다.

대중스님들이 모두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선당(禪堂)에 모여 참선(參禪)을 했다. 참선하기 전에 백장스님께서는 대중스님들께 꼭 설법을 하셨다. “공부는 때가 묻은 옷을 빠는 것과 같다. 옷은 본래 있는 것이나 때는 밖에서 온다.”

모든 소리와 색(色)은 기름때와 같은 것이니 아예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흐르는 허물과 삿됨을 끊고, 바른 공부하기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수행하면서 농사를 짓는 이른바 농선쌍수(農禪雙修)는 이미 4조 도신스님으로부터 비롯됐음은 바른 공부와 바른 길을 가는 납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도신은 500명의 대중이 세속에 기대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쌍봉산 의 산자락을 개간하여 논밭을 만들었고, 일부는 인근 백성들에게 경작할 수 있는 터를 나누어 주기 까지 했다. 그 결과 노동하는 수행자들의 신체는 건강하게 단련됐고, 절 주변에 사는 백성들은 세금이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스님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불교수행을 통한 “선과 노동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라는 선농일여(禪農一如)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지금 우리 출가자들은 어떠한가? 깊이 새겨볼 일이다. 고급승용차에, 골프 등 고급스포츠에, 고급음식, 술, 담배, 도박 등...
도신스님이 좌선을 근본으로 하되, 15년은 노동해야 한사람의 먹을거리를 얻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고 주장한바, 백장스님의 보청보다 100년이나 앞선 가르침이었다.
출, 재가를 막론하고 올 병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부처님의 가피받을 행(실천)을 하고 있는가? 살피고 또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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