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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로 밥을 지으려 하는가?- 바른정법 바른인연(35)
▲ 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출가의 궁극적 목적은 중생제도이고, 중생제도를 위한 첫 번째 관문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최고의 방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 출가수행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깨달음의 대상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또 그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깨달음의 내용과 생활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못하다.
그로 인하여 절집을 들락거리는 이들이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불교 전체의 혼란과 무질서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현실에서 문제되고 있는 몇 가지를 서술하면, 첫째 깨달아야 할 대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하여 정리되어 있지 않다. 막연하게 법, 진리, 마음, 본성, 본래면목, 진여, 여래장, 존재의 실상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흔히 법사들이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아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 달이 어디에 있는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이 역시 모호하다. 상식적인 일이 있을 수 없는 현실의 문제가 되고 있다.
등반의 예를 들어보면,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는 바 없다. 그런데도 무조건 열심히 가는 것이 중요하니 있는 힘을 다하여 밀어 붙이면 된다는 식이며, 그 결과는 헤맴의 연속일 뿐이다.

그리하여 불안과 초조가 가중되고 온갖 억측과 혼란이 깊어진다. 지금 우리 불교수행의 풍토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 과정이야 어찌됐든 깨닫기만 하면 된다. 과정이 무시되어도 깨달음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백정이 법문을 듣고 칼을 내던지며 “나도 천불(千佛)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 또는 육조스님과 영가(永嘉) 스님의 일문천오(一聞千梧)한 것을 예로 든다. 즉 언하대오(言下大梧),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논리이다.

그렇게 옛 스님들의 기연(機緣)은 그 과정에서의 방법과 내용에 대해 잘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며, 구체적이고도 성실한 수행생활 과정을 자세하게 살피기가 쉽지 않다. 또 깨닫는 한 순간의 통쾌한 장면만 접하게 되어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착각을 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현재 보고, 듣고, 말하고, 침묵하고 활동하는 일상적인 생활과는 무관하게 깨달음이 가능한 것처럼 여긴다.
마음씀씀이가 탐욕에 싸여있고 몸으로는 술, 담배, 도박 등 막행막식하며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면서도 참선, 간경, 염불, 기도, 참회 등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긴다. 무심히 들으면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이런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다. 여기에 살펴보면 자기모순과 기만이 숨어 있다.

옛 조사님들의 가르침으로 미루어 보면 “큰 의심 아래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셨듯이 무엇을 하든 간절하게 의심을 일으켜야 참된 참구(參究)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다 바치는 정진으로 일관하지 않는 한 참 수행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만일 옛 조사님의 가르침대로 전 존재를 집중하여 수행한다면 삼독심(三毒心)이 어디에 발 붙일 것인가? 감히 오늘날의 승가집단의 거친 생각과 거친 언어, 거친 행동 등 추악한 모습들이 나타날 수 없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삼독심에 젖어있으면서도 스스로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고 하니 이러한 생각은 스스로를 기만하고 세상을 기만하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자기모순과 기만에 빠지는 것은 전인적인 수행관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비원력(大悲願力)의 문제의식을 올바로 확립시키려고 하지 않는 탓이다. 체계적 공부와 수행의 기초가 준비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출가수행에 뛰어들어 맹목적인 수행을 하는데 문제가 있다.

마치 나아갈 방향은 살피지 않고 경전과 조사어록에도 없는 무조건 나아가면 된다는 식이다. 이에 대해 원효스님은 “어리석게 수행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이는 아무리 해도 제대로 될 수 없음을 뜻한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토대 위에서 성실한 일상생활이 유지될 때 바람직한 수행이 가능하다.
진중하게 살피지 않을 경우 수행 연륜만큼의 법에 대한 믿음과 안목이 형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진 없이 고생만 하게 되고 나아가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게 됨으로 원효스님의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셋째, 깨달음을 얻고 나면 파격적인 행동이 나와야 한다. 우리는 절집에서 초견성(初見性) 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다. 아니면 유사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 견성(見性)했노라고 호언장담하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꾸짖거나 견성을 했으므로 걸림이 없어야 된다며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들었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견성이란 저렇게 비인격적이며 비도적적인가? 정말 그래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혹 고불고조(古佛古祖)의 행적을 들어 문제를 제기하면, 경허, 만공, 전강스님의 예를 들면서 파격적인 언행을 못하는 사람은 참된 수행자가 아니라며 호된 질타를 하기도 한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견성했노라고 큰소리치던 수행자들이 뒷날 명예와 권력을 이고 지고, 방탕과 방종으로 흘러 스스로 삿된 소견에 빠져 자신의 공부를 그르치고 절집 전체에 구정물을 일으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넷째, 깨달음이란 먼 미래 생에나 가능한 입장이다. 지금은 인연을 맺고 참회하며 복 짓고 원을 세움으로써 다음 생을 기약함이다.

그 예로써 48대원을 세운 법장 비구의 인행(因行)과 석가모니불의 본생(本生)을 말한다. 현재의 불성실함이나 게으름 또는 부도덕하고 부족함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현재 자신의 문제는 죄업이 소멸되고 원(願)이 성취되는 먼 훗날 저절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신념으로 불사(佛事)를 하고 복 짓는 현상적인 일에 수행의 의미를 부여한다.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유위법(有爲法)의 공덕에 파묻혀 버린다.

이는 깨달음과 원력(願力), 참회의 참 뜻을 잘못 이해하고 파악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출가 수행자에게 대단히 심각하고도 위험한 일이다. 깨달음과 원력, 참회란 먼 훗날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완전과 불완전을 논할 것이 없지만, 깊게 하면 깊게, 낮게 하면 낮게, 완전하게 하면 완전하게 즉시에 실현되는 것이 불교적인 깨달음인 것이다. 지금 이 자리 여기에서 바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불교수행이 아니다. 바로 실현되도록 할 때 비로소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 참된 원력행자(願力行者), 참회행자(懺悔行者)인 것이다. 나아가 참된 불사, 참된 전법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願)이 성취되는 먼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금 바로 여기 매 순간 본원(本願)의 실천에 자신의 전부를 바칠 때 비로소 아미타불이 되고, 석가모니불이 되는 것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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