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던 더위가 구월로 들어서자 아무런 미련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초저녁 풀벌레 소리에서 가을이 묻어난다. 세상에서 가장 자기 몫을 잘 하는 이가 자연인 것 같다. 누가 귀띔해 주지 않아도 잎을 피우고, 열매를 달고, 물러설 때를 알고 옷을 갈아입는 자연의 순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계절이다.

아직 설익은 가을 초입에 우리 거제엔 문학의 향기가 섬 전체를 뒤덮었다. 한국문협거제지부에서 해마다 실시해온 선상문학회와 유배문학의 밤, 그리고 청마기념사업회에서 실시한 청마문학제로 문학축제의 가을을 열었다.

전국의 문인들이 대거 참석한 유배문학의 논쟁에서 행사장은 어느 해 보다도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정서의 ‘정과정곡’이 지금까지 부산의 동래에서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오랜 기간 동안 거제유배문학을 연구해 온 고영화 선생님에 의하면 어쩌면 정과정곡의 출생지가 거제임을 거론할 수 있는 증거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 거론에 맞대결을 하는 진주교대 송희복교수님의 증거 제시도 만만치 않았고, 이에 정서의 후손인 부산 거주 수필가가 후손으로서 정과정곡이 탄생한 곳에 대한 논거도 대단한 흥미를 주었다.

‘정과정곡’은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이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작자는 인종과 동서 지간으로서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의종이 즉위한 뒤 참소를 받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 때 의종은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이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작자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무신란이 일어나 명종이 즉위한 해였다. 작자의 호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이라 하였다. 유배지에서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절실하고 애달프게 노래하였다 하여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 때문에 궁중의 속악 악장으로 채택되어 기녀(妓女)는 물론 사대부간에도 학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정과정곡’이 어디서 탄생된 것인지는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부산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문인들은 부산에서의 탄생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였고, 부산이 아니라, 거제에서 탄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그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그 작품을 창작한 본인이 이 작품의 고향을 말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도 어느 것이 옳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작품을 쓴 본인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이다. 그때도 거제도엔 옥포대첩백일장이 있어서 거제도 전역의 문학청소년들은 옥포대첩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는 것이 마치 학생문학 등단의 출입문이 되는 것처럼 공인되어 있어 글을 쓰는 청소년들은 그 곳의 통과를 꿈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해 옥포대첩백일장의 시제는 ‘옥포만’이었다. 참석한 학생들은 옥포만의 수채화를 문자로 표현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필자도 점심시간이 지나갈 무렵 백일장의 종료를 알리는 징소리에 마지막 손질을 한 작품을 제출했다.

지금은 백일장이 끝나면 작품만 제출하고 돌아오면 심사결과가 공문으로 전달되지만, 그 당시엔 문인들이 직접 그 자리에서 심사를 했고, 그 자리에서 시상식까지 하여 참여한 학생들은 작품 제출 후 서너 시간은 족히 그 자리에서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다. 드디어 심사 결과가 나오고 나는 꿈에도 그리는 ‘장원’을 하게 되어 함께 수상을 했던 친구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내 기억으로는 부산일보라고 생각되는데 그 기자가 장원한 학생을 찾아 인터뷰를 한다고 나를 찾았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그 당혹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옥포만이라는 시제를 받고 옥포만을 어떻게 그려갈까 망설이다가 마침 그 곳에서 멸치를 잡고 있는 어선을 보고, 어부들의 억센 팔뚝과 첫 승전을 울렸던 병사들의 모습을 은유하며 그 전설이 옥포만에 휘돌아 거제를 빛내고 있다고 표현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자는 어부의 팔뚝과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의 팔뚝을 그린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하며 그런 표현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어떻게 할 수 있느냐며 내 문학성에 감탄하는 찬사를 보냈다.

그 때 나는 분명히 내가 표현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님을 전해야 했었다. 그런데도 나는 용기가 부족하였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 기자가 말한 것처럼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의미부여가 아닐 만큼 대단한 작품이라는 칭찬에 더욱 더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게 내 작품은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으로 부산일보를 장식하였고, 그 신문을 읽은 국어선생님께선 내 작품을 칭찬하며 앞으로 큰 문인이 될 것이란 축복과 함께 그 작품을 시화로 만들어 학교에 전시해 주었다.

나는 그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골마루를 지날 때마다 정말 눈을 감고 지나가야만 했다. 글은 분명히 내 작품이었지만 신문의 인터뷰내용은 전혀 내 것이 아니기에 그 뒤에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는 시를 쓴 사람만 그 내용을 안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정말 정서의 정과정곡이 의종을 향한 사모의 노래였는지? 부산에서 탄생하였는지, 아니면 거제에서 탄생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작품을 쓴 작자만이 알 뿐이다.

유배문학의 밤에서 사회자로, 주제발표자로, 토론자로 나온 모든 분들이 내린 마지막의 결론은 정서의 정과정곡이 어디에서 탄생되었던지 부산에도, 거제에도 정서의 혼이 묻어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문중 대표의 인사로 그날 행사의 열기는 끝이 났다.
우리 거제의 유배문학을 연구한 고영화 선생님의 기나긴 세월의 연구업적과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우리 거제가 유배지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지만 그 유배자들의 작품이 거제의 구석구석에서 창작되고 애창되고, 불리워졌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주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유산의 발굴인가?

우리거제에 유배온 유배자들이 남긴 시를 시비로 제작하여 일운면에서 동부면으로 넘어가는 황제의 고개에 거제출신 시인의 시와 함께 시비로 세워져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가을이 깊어간다. 이 가을엔 어떤 향기보다도 문학의 향기에 푹 젖어보자. 문학의 고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학의 향기가 더 멀리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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