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사고가 실시간 발병한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비교적 무덤덤하다. 인지상정의 관점에서 이를 ‘학습된 무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빼도 박도 못할 때’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심리학자(셀리그만)가 실험을 하기 위해 방 가운데 벽을 만들어 두 칸으로 나누었다. 한쪽 칸 바닥에 전류를 흘리고 다른 쪽 칸에는 그러지 않았다. 전류 칸에 개를 넣자 개는 충격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벽을 넘어 전류 없는 쪽으로 도망간다. 계속된 실험에서 개는 전기 충격을 받자마자 재빠르게 전기가 흐르지 않는 칸으로 피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번에는 개가 움직일 수 없도록 줄로 묶고 전류 칸에 넣어 충격을 가했다. 거듭된 실험 끝에 줄을 풀어주었으나 개는 전기충격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는 학습효과 결과였다.
오늘날 한국의 청년상을 이른바 삼포(연애, 결혼, 취업 포기)세대라고들 한다. 교과서의 수필(민태원)은 ‘청춘’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라고 칭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이 시대 청춘은 ‘걱정꺼리가 명치끝에 걸린 슬픈 초상’이 되었다. 꼭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조차 모른 채 빚내서 대학가고, 졸업하면 대출금 상환에 목을 매고, 취업을 못해 연애는 고사하고 결혼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청운의 꿈을 상실한 지대에서 탈출할 의지를 잃은 모습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이 터져도 그리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일반인의 심적 상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발버둥 쳐도 전기충격을 피할 방도가 없음을 알고 체념해버린 실험실의 개처럼 서민의 대다수는 빛이 안 보이는 현실을 수용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감정과 행동은 환경자극 자체보다 그 자극에 부여한 의미에 의해서 결정된다.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면 사건사고는 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의미로 과장(왜곡)되기 십상이다. 우울증도 이래서 생긴다.

꽃샘추위가 매서운 날, 막내가 휴가를 나왔다. ‘필승’하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군인을 보는 순간, 학습된 무기력 환자 1인인 나는 이 증상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유전면제 무전현역’,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세계유일의 분단전시 국가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꼽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방의 의무가 계층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고위관료, 재벌가로 형성된 지배계층은 이런저런 편법을 동원하여 군복무를 피하거나 가더라도 편한 곳으로 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들의 병역면제율이 일반국민에 비해 몇 배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미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돈과 권력이 탁상공론으로 애국을 일삼을 때 피지배계층인 서민은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킨다. 초소경계병이 어둠 속에서 익사하고, 동료의 가혹행위로 격살당하고, 황당한 총기 사고가 터진다. 가해피해를 떠나 참혹한 군대사고의 근거를 지배계층의 의무불이행에서 찾는다면, 나만의 오산일까.
병역의무는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도덕적인 일이다. 이 엄중한 의무는 국민의 안전과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된다. 아비가 늙으면 자식 세대가 물러받아 완수해야 한다. 사인(私人)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공(公)적 아버지와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감내해야 할 책임이다. 기본의무를 기피한 이들이 요직에 앉았으니 나라가 안녕할 리 없다. 기둥과 들보가 썩어 집 전체가 함께 무너져내려 앉는 느낌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집단의 비겁함에 대해 서민들이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떠들어도 서민의 원성은 그 높은 곳까지 닿지 못한 채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그쪽을 향해 질투할 수도 없다. 사회구조상 막강한 위쪽은 힘없는 아래쪽의 질투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무총리 아들의 병역면제에 서민아비를 둔 내 아들의 현역복무는 불가항력적이다. 창업주 손녀인 조현아의 성격장애에 박창진 사무장의 건강한 의식은 복수의 대상이 될 뿐이다.

서민이 밥걱정으로 수심에 싸였을 때 파워엘리트란 돈과 권력은 법의 허점을 노려 더 큰 것을 성취하기 위한 꼼수를 연구한다. 불법, 탈법, 부조리 등은 서민 쪽으로 흘러드는 전류다. 우리는 그 은밀한 형태의 공격을 피할 능력이 없다. 진실이 은폐된 욕망과 폭력을 고스란히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위쪽의 부당성에 대해 항변을 하고 정의구현의 필요성을 외치지만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된다. 열등한 자신에 낙담하게 되고, 무기력해진다.

무기력증은 세대를 넘어 학습되고 있다. 로또를 맞지 않는 한 대개의 서민은 유전된 환경 속에서 부모의 가난, 열등감, 죄책감을 그대로 답습한다. 암울한 생존은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가중시키고 막다른 골목에서 택하는 길은 하나다. 자살자 수가 그래서 급증하는 것이다.

박 정권이 바닥친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돈과 권력의 유전면제를 ‘절대’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고효능의 학습된 무기력 치료제이며 사건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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