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연인, 그들이 남긴 이야기 속엔 70년 이상 간직한 혼서지가 있었다. 이는 백수(白壽)를 앞둔 부부가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던 가장 값진 유산이었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는 결혼을 앞두고 찾아온 손녀에게 장롱 깊숙이 넣어둔 혼서지를 건넸다. 잘 간직하고 살면 그들처럼 의좋은 부부가 되어 백년해로(百年偕老)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들에게 그것은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하는 세월 속에서도 변할 수 없는 사랑의 진리였다. 한번 맺어진 부부의 연(緣)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라는 무언의 지침서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노부부는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요즘 보기 드문 부부애(夫婦愛)를 보이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런 만큼 그들이 함께 나눈 76년 세월은 돈(황금)보다 사람이 우선이었다. 할아버지는 시력이 좋지 않은 할머니가 우선이었고, 할머니는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가 우선이었다.

그들이 가는 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손에 손을 맞잡고 가야 했다. 사시사철 한복 커플룩을 입으면서까지 그들은 하나로 소통하면서 살았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하는 것을 습관처럼 즐기면서 살아간 두 사람이었다. 그럼으로써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요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임을 넌지시 일러주기도 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혼서지를 주고받으면서부터 풀어내기 시작한 그들만의 사랑방정식이었다. 그런즉 그들의 사랑은 어떤 상황에 따라 쉬 변하는 그런 성질이 아니다. 황금 덩어리를 발견하고 변심한 나머지 애인을 배신하고 고발하기까지 하는, 그런 물질적인 사랑은 아닌 것이다. 글자 그대로 그들은 ‘부부’였다.

이런 점에서 ‘백발의 연인’으로 통하는 로맨티스트 조병만 할아버지(98세)는 수천억을 소유한 어느 사학재단의 설립자처럼 그런 알량한 사랑은 하지 않았다. 아내 몰래 장롱 밑에다 금괴 130개를 숨겨 놓고 세상을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의 보물은 단연코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만년 소녀 같은 강계열 할머니(89세) 또한 할아버지보다 더 소중한 보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괴 주인 박 모씨의 할머니처럼 남편 사후에 도둑(인테리어업자)이 찾아낸 금괴를 받아들고 늘그막에 쓸 용돈이 생겼다고 즐거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세상에서 캐낸 금덩이는 한낱 장신구에나 쓰이는 귀금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릇 보물이란 세상 그 어떤 물질로도 환산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부부로 살다가 한사람이 세상을 떠난 이후, 뜻밖의 횡재인 양 덥석 안겨진, 그런 금괴 따윈 보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40개가 남아있든 130개가 남아있든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부부애란 금을 긋듯 수치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는 마음으로 한 발짝씩 다가서는 것이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관람하던 중 불현듯 65억 금괴 도난사건과 관련지어 사유를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아있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돌아다 보건대, 한평생 주인(할아버지)이 믿고 사 모았던 금괴는 그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지 못했다.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난 주인과 무관한 금괴는 도둑(인테리어 업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숨겨진 그의 가정사마저 들추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분쟁의 씨앗마저 남기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반면, 금괴로 인해 도둑은 애인과 함께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거머쥐며 쾌재를 부르다 변심한 나머지 새로운 애인을 만난다. 이로써 도둑이 애인을 배신하고, 애인이 도둑을 고발하여 쇠고랑을 차게 되는, 불행의 사태로까지 치닫는다.

여기서 ‘금괴’란 존재가 단단히 한몫을 한 것이다. 이른바 그들은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금괴를 사랑한 것이다. 그것은 10여년 만에 드러난 금괴가 가르쳐 준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란 있을 리가 없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이런 점을 환기시키면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거듭거듭 캐묻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인간극장 <백발의 연인>(2011)을 통해 소개된 바 있었지만 스크린을 통해 그들의 사랑을 재차 확인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내세(來世)로까지 이어지는 그것은 삶도 죽음도 다 초월한 사랑이다. 혼서지로 언약한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가치를 지닌 보물인 것이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도 서서히 저물어간다. 돌이켜 보니, 올해는 유난히 영화 같은 사건들이 많았던 것 같다. 눈만 뜨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터라 굳이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이른바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이 펑펑 쏟아졌다. 그리하여 필자는 착시현상에 빠져 정작 눈물을 흘려야 할 때를 놓쳐버리곤 했었다.

이런 와중에 다큐멘터리 형식의 독립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우리네 손수건을 흥건히 젖게 했다. 이제껏 느끼지 못한 카타르시스로 절로 터져버린 감성이었다. 그들을 통해 들여다본 부부애(夫婦愛)는 미사여구(美辭麗句)가 따로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소박미(素朴美)가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연신 훌쩍거렸다. 이유 있는 눈물이 아닐 수 없다. 인스턴트식 사랑이 홍수처럼 난무하는 이때, 우리가 정녕 믿고 살았던 것은 무엇인가. 돈인가, 사람인가.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마음 밭을 한번 점검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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