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은 봄날의 비릿함, 여름날의 발랄함, 가을의 서늘함, 계절의 경계를 허문 정제된 빛깔이다. 그 11월의 겸손한 풍경에 북페스티벌이 있었다.

광장에 수십 개 부스가 설치되었고, 초대된 몇 명의 작가들은 그 중 한 곳을 차지하고 앉았다. ‘펜 사인회’라는 취지하에 독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준비해 온 각자의 스무 권이 모자랄 성싶다. 독자들은 책을 ‘할인가’로 구입하게 되어 즐겁고, 작가는 독자와 함께하는 시간이면 무조건 좋다.

예상 밖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선 사람들이 작가 쪽을 흘깃 쳐다보거나, 아예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쳐 갔다. 독자를 유인하지 못한 책들이 무색해졌다. 외면당한 책을 바라보던 저자들은 ‘한국인 독서율 세계 최저’ ‘입시위주의 교육’ ‘생존에 급급한 경쟁사회’ 등의 불만을 토로했다. 마침내 한 무리 신사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중 한 사람이 악수를 청하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오늘 자리를 빛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인사차 온 주체측의 장(長)이었다. 책에 눈길 줄 시간도 없이 바빠 보였다.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가 황망히 다른 부스로 건너간 뒤, 몇 명이 또 그렇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갔다.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등을 떠밀어 간 곳은 발명품 전시, 동화 구연, 종이접기, 인형극 쪽이었다. 국화 전시장은 사진 찍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책 부스 안으로 기웃거리는 모자(母子)가 있기에, ‘들어오시라’고 반색을 했더니, 여인이 주춤 물러서며 한 마디 던졌다.
“요새는 책을 그냥 줘도 안 읽어요”
이 한 마디에 나는 미련없이 독자바라기를 철수했다.
마음 비운 시선에 늦가을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녀의 막말이 서운했으나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작가에게 던지는 따끔한 메시지였다.

‘공짜로 줘도’의 보조사 ‘~도’에서 몇 개의 이분법적 사고를 엿보였다. 거기에는 자신과 타자, 주관과 객관, 사실과 비약이 비벼져 있다. 예전에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거나, 자신의 생각을 대중적인 것으로 동일시하거나, 아이에게 굳이 책을 권장하고 싶지 않다거나 등등. 어떻든 간에 작가의 입장에서 재고해 봐야 할 말임에는 분명했다.

광의의 독자가 책으로부터 등을 돌린 까닭을 급변한 시대에 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정보화 시대의 스마트한 기기들이 책에 견줄 수 없는 속도로 대중의 삶을 지배하는 중이다. 생활은 업그레이드 되고, 익명의 자유로써 타인을 공격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버턴 하나로 지적 결핍을 해결하는, 가상공간의 서비스를 책이 뛰어넘는가. 책이 그만한 메리트를 갖고 있는가?

기실 독자를 잡는 비결은 작자의 몫이다. 작가의 끊임없는 자아비판과 습작의 고통이 그 해결책이리라.
작품은 작가의 아픔만큼 성숙한다. 이 성숙함은 사이버 세상에서의 그것과 다르다. 그것은 지상의 희노애락을 규명하려는, 작가의 노력과 시간이 발효제가 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독자는 작가에 바란다. 개인의 희(喜)와 락(樂)이 아닌 대중의 노(怒), 애(哀)로써 사랑과 노동을, 밥과 술과 라면 수요자의 리얼리티를, 삶의 진정성을 말해 달라고. 신변잡사를 뛰어넘어 사회를 주목하고, 도처에 곪고 있는 부스럼을 풍자와 역설의 기법으로 터뜨리라고. 문학적 기능이 실천된 이런 책이라면 감히 그런 발언을 할 수 없다고. 이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작가들이 오히려 문학을 죽인다고 데모라도 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책, 그냥 줘도 안 읽는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내 책이 주검 빛이다. 책 속의 언어가, 허당이고 헛것이라고 절규한다. 눈물까지 흘리니 저자의 기분이 죽을 맛이다. 이 심경을 논리적 해명 할 수 없다.
누군가의 폰에서 시 낭송이 흘러나왔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였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만추의 신화가 된 한 편의 시(詩)가 울고 싶은 저자의 뺨을 후려치고 있다. 박인환은 동족상잔으로 나라가 쑥대밭이었던 때 이 시를 썼다. 당대는 폐허와 허무, 체념, 상실감의 색채가 짙은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가 그 대표격이다.

삼시 세끼 해결이 시급했던 전쟁직후, 현실은 막막하고 미래는 불온했다. 시인은 상실된 꿈을 목마에 비유하여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고 했다. “떨어지고” “부서지고” “죽고” “버릴 때” 등. 희망부재의 시어들로 낭만의 신기루를 쫒는 양상이다.

하지만 이 비극적 언어들은 ‘문학도 죽고 인생도 죽’은 암울한 역사의 은유이다. 이 시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특유의 사색적 정조(情操) 때문이리라. 송년에 선 사람들이 오늘도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지친 심신을 위안 받고, 놓아버린 희망을 예인하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다. 독자는 문학으로부터 감동과 위안을 기대한다. ‘나’의 책이 그런 가치를 지녔는가.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책 잔치에 독자가 없는 이유를 깨달은, 값진 기회였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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