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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민 구국의 혼이 담긴 - 중금산성지(中錦山城址)1875년 시방, 율천, 대금 주민이 쌓은 비공식 조선시대 마지막 산성,

△ 중금산성 남문지

백성 스스로 쌓은 성

5000여 평 진달래 군락지로 매년 봄이면 전국 상춘객의 사랑을 받는 장목면 대금산 자락(대금산 중봉)엔 비록 등록문화재로 아니지만 의미 있는 문화재 하나가 있다.

비공식적으로 조선 시대 마지막 축성된 중금산성이 그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보통 지정문화재가 월등히 뛰어나고 비지정문화재는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정문화재가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또는 사료의 가치 등으로 보면 비지정문화재보다 중요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비지정문화재가 덜 중요하거나 문화재적 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된 정책으로 비지정문화재가 빛을 못 보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중금산성은 역사적 배경이나 규모, 학술적 잣대로 견주면 거제지역에 있는 다른 성곽유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중금산성은 관(官)의 주도가 아닌 백성(民) 스스로 만들어낸 방어시설이라는 점에서 거제가 자랑하고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다.

△중금산성에서 본 대금산

중금산성은 누가 쌓았나

거제군지에 따르면 중금산성은 고종 12년(1875년)에 주민 강석원(姜錫元), 정춘식(鄭春植), 김정헌(金正憲) 등 세 사람이 장목면 시방, 율천, 대금 마을주민을 동원해 식량을 저장하고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기록대로라면 1873년 거제부사 송희승이 쌓은 옥산금성보다 2년 늦게 쌓은 산성으로 조선 시대 마지막 산성이 되는 셈이다. 당시 거제부사는 김학희(金鶴喜)였다.

1875년은 옥산금성을 쌓은 전 거제부사 송희승이 삼척영장(三陟營將)으로 임명됐다가 거제부사 시절, 옥산금성 축성으로 백성에게 부담을 주고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는 죄로 파직되고 유배를 갔던 시기다.

중금산성과 이보다 2년 앞서 축성된 옥산금성은 후세 사람들에게 효율성이 떨어지는 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 중금산성 남문지 'ㄱ'자 옹성

근대로 접어든 시기에 성을 축성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여겨지지만, 역사적 배경을 살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1875년 전·후로 조선은외침에 시달렸다. 1866년(고종 3)에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병인양요가 있었고, 1871년(고종 8)에는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신미양요가 있었다.

그리고 중금산성이 축성된 1875년엔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기 위해 측량을 핑계로 군함 운요호를 보내 강화도와 한강 일대에 포격을 가하고 살육, 방화,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다. 훗날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강요해 그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이런 정세 속에 거제지역에 2년 사이 방어시설인 산성이 차례로 축성된 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어 보인다. 거제지역은 우리나라 남해안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중금산성에서 본 부산 앞바다

지리적으로 보면 중금산성은 거제도 북단에 해안에 있어 부산항과 대마도 대한해협을 경계하기에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또 북쪽으로 장목진과 구율포성이 있다.

대금산 중봉 정상 285m 부분에 테를 두른 듯 축성한 테뫼식 산성인 중금산성은 평면 타원형으로 남쪽과 북쪽 성내는 ‘ㄱ’자 모양의 옹성(甕城)문지를 가지고 있다. 성의 상단 부분은 성내부 지면에 맞춰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은 상태다.

‘ㄱ’자 모양의 옹성(甕城)문지는 옥산금성과 같은 구조로 적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는 남쪽과 북쪽에 방어기능을 더해 효율적인 방어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중금산성의 석축방식은 같은 시기에 쌓은 옥산금성과 비슷하지만 규모나 짜임새 면에서는 허술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관의 주도가 없이 백성들만의 힘으로만 쌓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식량 저장고를 만들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뤄 중금산성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등산객들을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등받이의자와 운동시설 등이 잡풀에 뒤엉켜 방치돼 있을 뿐 건물이나 문루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또 중금산성 중간 부분에 위치한 둔덕은 성 인근에서 키우던 말 무덤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중금산성은 외침을 우려한 거제도민 구국의 혼이 담긴 장소라는 점에서 지역민들에게 사랑받아야 할 장소지만 관광지 개발에도 좋은 장소로 보인다.

중금산성에선 거가대교와 이수도 너머 부산 앞바다와 대한해협이 그림 같이 펼쳐져 이 곳을 찾는 방문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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