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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51년 ~1953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한국전쟁의 상흔과 교훈이 서린 곳,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그리고 포로수용소

거제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수용소였다.

한국전쟁 최초의 공식 포로수용소는 대전포로수용소로 1950년 7월 8일 국군이 잡은 북한군 포로 5명을 대전형무소 내 수용했다.

이후 한국군의 잇따른 패배로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그해 7월 14일에는 대구 효성초등학교에 <제100포로수용소>가 세워졌다가 부산 등지로 옮겼고, 나중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사령관에게 이양되면서 미군의 포로수용소와 통합된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과 중공군의 참여로 포로가 늘어나면서 유엔군은 포로들의 대규모 수용과 관리를 위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 때가 1951년 2월이다.

하루아침에 사람들로 들끓었던 거제도

최초 유엔군사령부가 수용소 후보지로 생각한 섬은 제주도였다. 유엔군 사령관은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부산의 포로수용소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고려해 보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리지웨이 장군은 제주도가 이미 피난민으로 초만원에다 식수 부족, 오랫동안 공산주의 세력이 강했다는 점, 피난한 한국 정부가 이 섬을 임시정부의 이전 장소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결국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의 몫이 됐다.

반면 거제가 포로수용소의 적지로 꼽힌 이유는 육지와 가까운 섬이기 때문에 물량수송이 편하고, 최소 인력과 경비로 포로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 특히 섬인데도 식수가 풍부하고 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땅이 비교적 넓다는 것이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계획수립과정에서 처음 6만 명 규모로 계획됐다가, 나중에는 22만 명의 포로를 수용하는 규모로 확대됐다.

거제지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지역은 섬의 중앙에 해당하는 현재 고현동 일대를 중심으로 용산, 장평, 문동, 양정, 수월, 제산리와 연초면 임전, 송정, 남부면 저구리 일대였다.

또 전쟁 후반 포로 분산작전이 시행되면서 한산도 봉암도와 인근 용초도에도 수용소가 설치 됐다(1952년 6월). 봉암도와 용초도는 주로 악질(친공 포로)포로들이 수용됐는데 이들은 탈출시도, 폭동, 군사훈련 등으로 경비대를 괴롭혔다.

1951년 2월 초에 시작된 공사는 2월 말에는 포로수용이 가능해질 만큼 만들어졌다. 거제도 전체 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는데, 1개 단위 구역에는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51년 6월 말까지 인민군 포로 15만, 중공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 3000여 명의 포로를 수용했고 여자 포로도 300여 명 수용됐는데 여자포로수용소는 현재 수양동 주작골 인근 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거제포로수용수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제네바 협약을 최대한 지키려한 유엔군에 의해 당시 기준으로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료에 따르면 1953년 2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매일 94톤의 쌀 및 다른 곡물이 소비되고 있었고, 이 밖에 노루고기, 소고기국, 돼지국, 소금에 절인 쇠고기, 육고기와 야채류, 계란 등이 지급됐다.

또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포로들 중에서 요리사를 뽑아 근무시켰으며, 포로들은 매일 신선한 채소와 깡통에 든 채소, 말린 콩과 완두콩, 후추, 간장, 소금, 하루 10개비의 일제 담배가 든 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을 지급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이들을 지키던 한국군 경비대의 보급은 열악해 포로들에게 음식을 구걸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거제포로수용소는 냉전 시대 이념 갈등의 축소판으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에 유혈 살상이 자주 발생했다.

특히 북한이 거제포로수용소 내 친공 포로의 관리를 위해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인 박상현을 밀파하면서 친공 포로들은 더욱 조직적인 투쟁활동을 펼치게 된다.

1952년 송환 심사에 대한 항거폭동인 <2·18 사건>과 1952년 5월 있었던 돗드 준장(당시 포로수용소장) 피랍사건은 모두 박상현이 배후였다.

한국전쟁으로 조용한 바닷가 섬 동네였던 거제지역은 1951년 2월부터 포로와 피난민, 군인, 거제지역민들로 하루아침에 사람이 들끓는 섬이 됐다.

거제시지에 따르면 당시 거제인구는 지역민 10만 5000여 명, 포로 17만 3000여 명, 군인 9000여 명(1951년 말 국군 제33 경비대대, 미군 1개 대대 및 187 공수부대 등 9500여 명), 피난민 15만여 명 등 40만 명이 넘었다.

상흔 위에 교육의 산실이 된 포로수용소유적

1953년 6월 18일 휴전이 가까워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시킨다. 이 사건으로 반공 포로 3만 4900명 중 2만 7389명이 탈출했다. 이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됐고, 포로수용소 설치 이 후 60여 년이 지난 현재는 당시의 건물 일부가 남아서 보존되고 있다.

지난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은 거제시가 지난 1999년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해 유적관으로 개관했다.

또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해 개관하고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해 현재 규모의 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전쟁역사의 산 교육장과 관광명소로 탈바꿈해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0월에는 기존 관람 위주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시설과 달리 세계평화미래관(평화전시관, 4DFX극장), 어린이평화정원, 평화수호대, 평화탐험 체험관 등 다양한 체험시설이 갖춰진 ‘포로수용소 테마파크’를 개관했다.

참고자료<거제시지·2002>,<거제포로수용소·2000>,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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