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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 승전고가 처음으로 울린 - 옥포진성남해안 수군 관방성 중 드물게 평지에 축조, 1990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04호 지정

“이달에 경상도(慶尙道) 부산포성(富山浦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026척(尺)이었고, 옥포성(玉浦城)은 둘레가 1074척(尺)이며, 당포성(唐浦城)은 둘레가 1445척(尺)이고, 가배량성(加背梁城)은 둘레가 883척(尺)인데, 모두 높이가 13척(尺)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43권, 21년(1490년) 8월 29일(기유) 2번째 기사에 나오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04호 옥포진성의 축성 기록이다.

하지만 524년이 지난 옥포진성의 성곽은 초라하다. 현재 옥포진성은 옥포교회 앞 민가 사이에 성벽 일부만이 겨우 옥포진성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옥포진성은 일제강점기까지 성안에 연못(忠武井이라 불렀다고 함)과 맑은 우물이 있었고 동서남북 네 방면에 문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마을이 번창하면서 훼손이 빨라졌고, 결정적으로 1970년대 옥포지역에 대우조선소가 들어서고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1995년 동아대 박물관이 거제지역 성지 보고서 때 만든 옥포진성 지적도
남아 있는 옥포진성의 형태만 보면 경상남도 기념물에 지정됐다는 사실조차 신기할 정도지만 옥포진성이 가진 가치는 거제지역의 여느 문화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옥포진성은 남해안 수군 관방성 중 드물게 평지에 축조됐을 뿐 아니라 다른 진성에 비해 사용기간이 길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한때 옥포진성은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수군을 지휘했던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에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수군에 의해 재수복됐다. 이순신 장군의 첫 승첩인 옥포대첩의 역사다.

이순신 장군의 불패신화가 시작된 첫 승첩지인 옥포진성은 거제칠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였다.

견내량진이 우리나라 내해를 지키는 중요한 길목이었다면 옥포진은 외해에서 내외로 접근하는 길목을 지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옥포진과 옥포진성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잦은 왜적의 침입을 염려한 조선은 세조 때 남해안의 해안방비 강화를 위해 거제지역에 수군이 머물 수 있도록 옥포와 조라포 등 7개의 진(鎭)을 설치하고 성종 때엔 옥포진에 진성을 쌓았다.

거제시가 설치한 옥포성 안내판에 따르면 옥포성은 <증보문헌비고>에는 1488년(성종 19)에 축성됐고, <성종실록>에는 1490년(성종 21년)에 쌓은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성종실록> 176권, 16년(1485년) 3월 25일 6번째 기사에는 “옥포의 보(堡)를 설치한 곳은 좌지가 남향인데, 둘레가 1440척이고, 동서의 길이가 360척이고, 남북의 너비가 340척이며, 보 안의 샘이 셋이고, 못이 하나”라는 기록이 있어 성곽의 기본 축성 시기는 안내판에 기록된 시기보다 앞선 것으로 짐작된다.
보(堡)가 작은 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종실록에 기록된 옥포진의 보 설명과 뒤에 지어진 옥포진성의 설명과 규모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옥포성의 규모를 ‘둘레는 1074척(325.45m), 높이는 13척(약 4m)이며 성내에는 우물과 연못이 하나씩 있다고 기록돼 있다.

지난 1995년 동아대박물관이 조사한 성지보고서에 따른 옥포진성의 규모는 둘레 590m, 높이 1.2m, 폭 3m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3년(1497년)의 기사를 보면 옥포성에 관사가 없어 관사를 지어야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옥포진성은 성이 완성된 이 후 한동안 관사가 없다가 뒤늦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옥포성의 성곽 형태는 물론 관청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상태지만 1872년 만들어진 지방지의 옥포진성을 보면 옥포진성 안에 객사가 가장 중심에 있고 바닷가 쪽인 동문 앞 포청(砲廳)과 선소(船所) 앞에 전선이 정박해 있었다.

또 이 지도에는 옥포성 내에 화약고, 객사, 교청, 동헌, 사창, 이청, 왜량고(倭粮庫)가 있었고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도제작 당시는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관리가 소홀해 성과 문루의 훼손이 심했던 상황임을 지도 여백의 고적조(古蹟條)에 기록한 것으로 미뤄 이때부터 옥포진성의 훼손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포만은 우리나라 남해안 방어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거제칠진 중 옥포진과 조라진이 설치됐다.

옥포진과 조라진의 거리는 지척인데, 같은 바다를 끼고 진이 두 곳이나 설치된 사례만 봐도 이 지역이 남해안 방어에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 수 있다.

옥포 지역은 대한해협과 대마도가 맞닿은 곳에 있어 외해(外海)에서 내해(內海)로 가는 입구를 지키는 데 알맞은 곳이다. 거제칠진 중 가까운 거리에 진(鎭) 두 곳이 집중적으로 설치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동아대학 박물관 거제지역 성지보고서>, <조라사>, <거제시지>, <거제고문헌총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지리지 종합정보>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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