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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잔상 거제의 왜성선조들을 피땀으로 만들어진 외침의 쓰라린 상처

400여 년 전 일본의 조선 침략의 흔적 고스란히

거제지역에는 임진왜란 때 세운 왜성(倭城)이 4곳 정도 남아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견내량, 장목 지역에 남아 있는 왜성들이다.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조선침공과 근거지 확보, 보급로 확보, 연락망 확보, 조선군의 공격 대비 등을 목적으로 우리의 선조들을 동원해 만들어졌다.

역사는 기록에 의해 전해지고, 유적에 의해 증명된다는 관점에서 왜성은 단순한 외침의 흔적이 아니라 외침으로 인한 아픈 기억과 실상을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거제지역의 왜성은 대부분 임진왜란 초기(1592~1593년)에 축조됐는데, 영등(구영), 송진포, 장문포, 지세포, 광리(견내량) 등에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영등포, 송진포, 장문포 등 장목지역의 왜성은 왜군의 최후 주둔지 역할을 했고, 한산도 통제영과 30리 남짓 거리에 위치했던 견내량왜성은 조선군과 왜군이 4년 가까이 대치한 군사분계선 역할을 한 곳이다.

현재 거제지역의 왜성은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는 곳이 없는 상태다. 그나마 형태가 남아 있는 곳이 장문포왜성(長門浦 倭城) 정도다.

1745년부터 176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비변사인방안지도>, 1750년대 초반에 제작된 <해동지도>, 1800년 이전에 만들어진 <광여도>에는 송진포왜성, 장문포왜성, 견내량왜성이 표기돼 있다.

하지만 1872년 만들어진 지방도 및 <장목포진지도>에는 송진포왜성과 견내량왜성의 표기가 없어졌고, 견내량왜성이 있던 자리에 ‘왜성리’라는 마을이 표기돼 있는 것으로 미뤄 볼 때 아마 이 시기쯤부터 견내량왜성과 송진포왜성은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성곽과 왜성은 외관상으로 쉽게 구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성곽은 기울기가 90~80도 정도로 직각인데 비해, 왜성은 성곽의 기울기가 70도 내외로 비교적 우리나라 성보단 많이 기울어져 있다.

학계에선 우리나라에 분포돼 있는 왜성의 형태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이유는 오랫동안 방치된 이유도 있지만 축성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성은 내외 협축식으로 쌓는 것에 비해 왜성은 외각에만 돌로 채우고 나머지는 보통 흙으로 만들어져 한번 무너지면 복원이 힘들기 때문이다.

거제지역 왜성에 대한 역사 기록이나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다. 거제지역에 남아 있는 왜성과 왜성을 쌓은 인물을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장문포왜성

경남 문화재 자료 제273로로 등재돼 있는 장문포왜성은 맞은편의 송진포왜성이 있다.

장문포는 장목면 장목항의 옛 이름이다. 항구는 좁고 긴 거제의 관문이기 때문에 장문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장문포왜성의 둘레는 710m이며, 성벽의 높이는 3.5m이다. 성벽은 대부분 훼손됐고, 성곽 주변에는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확실한 구조와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겨우 성벽의 기단부만 남아 있으며, 근처에는 기와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고 외성과 내성의 형태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다.

장문포왜성의 왜군은 1594년 9월 29일에서 10월 4일까지 이순신 장군과 해전을 치뤘다. 1·2차로 장문포, 영등포해전으로 구분하는 장문포해전은 조선 전함 140여 척과 왜군 전함 100여 척이 충돌해 왜군은 배 2척이 불에 타 없어졌고 조선은 전선 1척, 사후선 3척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한다.

장문포왜성은 조선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장문포해전에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김덕령 장군 등 육군과 수군이 합동으로 참여한 의미 있는 전투이기도 했다.

난중일기에는 “1594년 9월 29일에 배를 내어 장문포 앞바다에 돌입하였으나 왜적이 깊이 숨어 나오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송진포왜성

송진포왜성은 장목면 금무정(국궁장)을 찾으면 쉽게 찾아 갈 수 있다.

왜군 제5진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장문포왜성과 송진포왜성을 쌓고 장목만의 입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1592년에 지어진 이 산성의 둘레는 420m이고 높이는 3m, 폭은 3.2m이다. 성(城) 안에는 누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상태며, 성터 주변에 기와조각들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은 송진포왜성이 있는 곳을 ‘시루봉’, 또 왜성을 시루성이라 불렀다고 전하는데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본은 성(城)을 ‘시로’라고 말하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송진포왜성과 장문포왜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휘하 장수로 시즈가타케 칠본창(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위와 공을 세운 7명) 중 한 명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축성 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임진왜란 때 제5진의 지휘관을 맡아 충청도를 침공했고, 그 공으로 오와리국의 영주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가담해 도요토미파를 공략하고 히로시마와 빙고를 영지로 받는다.

현재 영등포왜성은 구영등성의 일부를 개축해 조선성곽과 혼합된 형태로 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등왜성

영등왜성은 장목면 구영리의 대봉산 정상(해발 257m)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간 해발 234m 일대에 위치해 있다.

거제지역 왜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영등왜성은 장문포왜성과 송진포왜성은 물론 바다건너 웅천왜성, 안골포왜성, 명동왜성과 연결된다.

현재 영등포왜성은 구영등성의 일부를 개축해 조선성곽과 혼합된 형태로 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 온전한 성곽의 형태는 찾기 힘든 상태다.

특히 영등포왜성은 한산도대첩 이후 일본이 가장 먼저 구축한 왜성 중 하나다. 1592년 한산대첩 이후 지어진 영등포왜성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축성하고 수비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 당시 일본 측 지휘관이기도 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정유재란(1597년) 때 1000여 척의 일본 전선을 총집결시켜 연합 함대를 조직해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元均)이 지휘하던 조선함대를 격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라북도 남원성을 점령하고 조선의 도공 80명을 일본에 강제 연행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1598년 봄에 사천 선진리성에서 7000명의 병사로 조(朝)·명(明) 연합군 4만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고 12월에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출하기 위해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갔지만 노량해전에서 패전해 겨우 50여 척만 남아 일본으로 도주했다.

광리왜성

광리왜성 또는 견내량왜성은 일본 측 문헌에 기록된 왜성동성(倭城洞城)으로 추정(推定)되는 성이다.

둘레350m의 토성(土城)을 쌓아 견내량(見乃梁)목을 감시하던 광리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동안 왜군을 주둔하며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성의 흔적은 거의 없다. 광리왜성은 왜군이 내해(內海)를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가는 교두보 역할은 물론 거제지역과 부산, 진해 지역에 만든 왜성들을 방어하고 한산도의 조선수군을 감시하는 초소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비장 및 성을 축성한 장수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성을 축성하고 방어한 장수로 ‘가라시마 세토근치’와 ‘소 요시토시’라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가라시마 세토근치’라는 장수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주 정종성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출전한 기록이 있다.

특히 소 요시토시는 임진왜란 발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훗날 조선통신사 등 왜와 조선의 외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1진 사령관 및 총사령관, 정유재란 2군 사령관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장인으로, 장인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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