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부님과 수녀님의 모습을 처음 대한 것이 중학교 2학년 때이다. 그때 카토릭재단인 우리 학교는 신부님이 교장선생님으로 계셨고, 학교 내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녀님들이 학교로 들어오셨다. 신부님께선 성당에서 담임신부님과 학교를 책임지신 교장선생님의 두 가지 역할을 하셨고, 수녀님께서도 담임선생님이 되셨고, 각 학년의 중요 과목을 직접 가르치셨다.
처음 수녀님께서 수업을 맡게 되었을 때, 학생들은 수업보다는 처음 보는 수녀님에 대한 호기심으로 짓궂게 놀리기도 했고, 수도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여 수녀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수녀님들이 들어온 후의 이런 혼란은 몇 개월의 세월과 함께 사라져가고 우리는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지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감동하여 깊이 따르며 참으로 훌륭한 학습활동을 갖게 되었다. 그때 우리들을 가르치셨던 수녀님들의 출신학교는 모두 대단했으며 교과 수업외 시골학교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교육활동을 체험하게 해 주셨다. 미술을 지도하셨던 수녀님께선 흔히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으로 국전에 여러 번 수상을 한 예술가로서 스켓치, 채색기법, 그림 감상법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셨다. 국어를 맡으셨던 선생님께서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문학의 밤’을 경험하게 해 주셨고, 문집발간, 시창작, 독후감대회 등 문학적 소양을 갖추게 해 주셨다. 체육을 맡으셨던 수녀님께선 그 긴 수녀복을 흩날리며 꿈꾸듯이 ‘은파’에 맞추어 발레를 지도해 주시던 그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학생들의 교육활동 뿐만이 아니다. 수녀님들께선 모두가 부족함 투성인 시골 학생들의 아픔을 어떻게 낱낱이 파악하셨는지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참으로 따뜻하게 품어주셨다. 그 당시엔 새 교복을 맞춘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졸업하는 언니와 연결하여 헌 교복을 싼 값으로 사 입어 모든 여학생들의 후레아스카트는 늘 검정빛이 아니라 물이 낡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 이렇게 낡은 교복을 물려 입는 것은 남학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날 수녀님께서 수녀실이 있는 4층으로 나를 불렀다. 4층에 있는 수녀실은 수녀님들께서 숙식을 하는 곳으로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었기에 4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부르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복도를 중앙으로 양 옆으로 방이 여러 개 있었는데, 삐끔 열려있는 두어 평 남짓의 방안엔 아무런 장식품도 없었고 작은 목침대 한 개와 벽에 붙어 있는 성모상이 보였다. 너무나 간결한 방 안의 모습에 놀란 나에게 수녀님께선 웃으시며 새 교복 한 벌을 내미셨다.

그 당시 우리 학교는 중, 고등학교가 분리되지 않아서 교사들도 교실도 다 함께 생활하고 있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도 중학교 교복을 그대로 입고 다니는 내 모습을 눈여겨보신 모양이다. 교복을 받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수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깨어있는 자만이 복을 받을 수 있단다. 잠든 자는 기뻐할 수도 없다.’라는 말씀이셨다. 힘들고 어렵지만 절대 절망해선 안 되며 늘 준비하고 깨어있어야만 기쁜 일을 받을 수가 있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때 나는 내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수녀님으로부터 무엇인지 모르는 편안함과 감사함과 희망의 메세지를 받게 되었고 그 메세지는 내 삶의 희망이 되어 주었다. 물론 이런 희망의 메시지는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주 실시되었다. 교장선생님이셨던 신부님께서 아침조회 때마다 들려주셨던 훈화도 우리를 감동시켰다. 한 번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고 행복은 자신의 가슴에 있기에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힘을 길러야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이런 교육의 기회를 통하여 앞으로의 삶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알려주어 우리는 가장 예민하고 감성적인 시기를 슬기롭게 보낼 수 있었고 그 힘들고 암울했던 가난의 세월도 마음 풍성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모르는 분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어 학교내외가 편했고 안심하고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행복함이었다고나 할까?

프란치스코교황이 4박5일 동안 100시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떠났다. 한국방문 내내 희망의 손길로 가장 낮은 곳을 보듬어주셨고, 안아주고 손잡아주어 그와 마주한 사람들은 한없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특별히 헤미읍성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폐막미사에서 젊은이들에게 늘 깨어 기뻐하며 세상 속으로 나아갈 것을 당부했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특징인 낙관주의와 선의(善意)의 에너지를 선용(善用) 할 것을 당부했다.

그 누가 이렇게 모두에게 행복한 표정을 짓게 할 수 있을까? 그 누가 이념과 종교, 빈부(貧富), 지역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평화 희망의 100시간을 선물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혼자만의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있고,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그 아픔을 누군가가 치유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가장 예민했던 중. 고등학교 시절에 수녀님 앞에만 서면 궁핍함도, 어려움도 봄눈 녹듯 사라지고 마음이 풍성해지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시절이 행복했던 그 기억은 바로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준 행복의 메시지와 따스한 손길 이였다. 아마 교황방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받은 이 훈훈함도 이런 심정과 같지 않을까? 내 학생시절의 꿈을 갖게 해준 ‘잠들어 있는 사람은 기뻐할 수도 없다’라는 메시지를 교황의 메시지로 다시 듣고 보니 사람의 마음을 치유시켜주는 것은 물질과 능력과 부가 아니라 진정 따뜻한 마음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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