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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기념물 제109호 - 가배량진성경상우수영과 통제영이 있던 최전방 해상진영


1597년, 단 12척의 배로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공격에 맞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이 최근화제다.

1000만이 넘는 관객몰이를 하는 등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영화의 배경무대가 된 진도는 관광객이 몰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거제지역에도 명량대첩에 버금가는 이순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첫 승전인 옥포대첩을 비롯해 율포해전, 한산대첩(견내량)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올라 이후 장문포해전, 영등포해전 등 일본군에게 두려움을 심어준 승리의 고장이다.

이순신 장군의 대명사가 된 삼도수군통제사는 당시 거제 땅이었던 한산도 진영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한산도 본영만큼 중하게 쓰인 진영이 있다. 경상우수영이면서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었던 경상남도 기념물 제109호인 가배량진성(오아포)다.

지금의 동부면 가배지역에 있었던 오아포는 조선 초기 세종 원년(1418년)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 후 수군진영이 재구축 돼 최전방 해상진영으로 역할을 톡톡히 해낸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가배량진성은 처음 성종 19년(1488) 6월 경상우수영수군절도사영성(慶尙右水營水軍節度使營城)으로 축조를 시작해 성종 22년(1491)에 완성됐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돼 한산도에 통제영 본영 구축하고 오아포엔 기존 경상우수영 수군절도사영성보다 더 큰 규모로 연장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후 1597년 2월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고 3월에 통제사가 된 원균 장군이 통제영을 오아포로 다시 옮겨 7개월 동안 통제영으로 사용하다가 칠천량패전 이후 전략상 전라도 고하도·고금도로 통제영이 옮겨졌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4년(1601)에 오아포엔 다시 통제영 세워지지만 체찰사 이덕형이 통제영으로 적당하지 못하다는 장계를 조선 조정에 올림에 따라 이듬해인 1602년 5대 통제사 류형이 춘원포(통영 광도면 안정만)로 통제영을 옮긴다.

지금의 통제영은 선조 37년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지금 통제영 자리)에 통제영을 옮기면서 세워진 것이다.

만일 가배량 통제영이 계속 유지됐더라면 거제지역의 행정명이 ‘거제’가 아닌 ‘통영’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통영지역은 임진왜란 전까지 가배량수라 부르다가 임진왜란 이후 한산도와 두룡포에 통제영이 설치되면서 ‘통영’이라는 지명이 붙었기 때문이다.

이후 오아포엔 가배량진이 설치돼 만호를 두면서 남해안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해오다 1895년 전국의 진영이 폐지 될때까지 거제 8진중 하나인 가배량진(1604년~1895년)의 역할을 해냈다.

현재 남아 있는 가배량성은 둘레는 350m, 높이 4m 정도로 동남쪽 체성(250m)이 가장 잘 남아있다.

임진왜란 전인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가배량성의 둘레는 794m(2620척)으로 기록돼 있고, 1659년 간행된 동국여지엔 1097m(3620척)로 기록돼 경상우수영 및 가배량진성으로 사용되던 당시 원래 성의 규모를 짐작 할 수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 기록에 따른 성의 둘레 변화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가배량성을 얼마나 증축했는지도 알 수 있다.

또 가배량진성 안 가배량 마을에는 통제영과 가배량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통제영 관아가 있던 곳을 가배량의 관계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옛 가배초등학교 인근이다. 이 곳에는 통제사 설치이후 약400년 동안 한 번도 마르지 않았다는 ‘관계샘’이 있고, 인근 강재선(여ㆍ65) 씨 집엔 통제영 주춧돌로 불리는 바위가 두 개 있다.

강 씨는 “현재 돌은 20여 년 전 마을 안 도로공사를 하면서 집으로 옮긴 것인데 40여 년 전 시집올 때 이웃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옛날 조선시대 때 관리들이 말에서 내릴 때 노둣돌(하마석)로 사용했고 인근에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다는 이야길 들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1년 만들어진 동부면지엔 가배마을엔 동헌관아가 근대까지 남아 있었으며 객사와 포도청, 관사가 있었던 위치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또 동부면지에 기록된 마을사람들의 구전에 따르면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본 사람들이 우리문화 유적을 약탈하자 마을사람들이 가배량진성 동헌에 있던 중요한 물건과 문서를 큰 항아리에 넣어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지만 위치는 전해지지 않는다.

특히 가배량성에 있었던 누대의 기록이 흥미롭다. 가배량진성엔 만경루, 청해루, 임해루 등 세 개의 누대가 있었다고 한다.

만경루와 청해루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임해루는 우수영의 방어 초소 역할을 한 누각으로 바다와 가까이 접해있다는 기록이 있어 가배량진성의 서쪽 체성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가배량 진성 남쪽과 서쪽 체성 일부에는 방어용 해자와 치성의 흔적과 망루(남쪽 체성) 등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및 가배량진과 관련된 지명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성을 은폐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남방숲, 승마와 무술을 가르쳤던 승마장(활목- 가배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1km 지점인 함박금 마을 진입로에 위치), 임진왜란 당시 각종 무기를 수리하던 불묵개, 무기를 만든던 불묵골, 송장터, 동문, 성밖, 비석거리, 망산 동방산 봉화터 등이 그곳이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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