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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이 이어온 300년 배움의 터 - 반곡서원거제지역 유교문화 창달에 주도적 역할해 온 소중한 문화유산

유학의 나라 조선에는 향교와 서원이라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이 존재했다.

향교는 오늘날 공립 중등 교육기관 성격으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보다는 낮은 단계의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교 이념을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고을마다 향교를 설립했는데 향교는 수령이 파견된 곳에 반드시 설치됐다.

또 다른 교육기관인 서원은 향교와 함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사립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하지만 서원은 향교와 달리 지방 사림들이 자기세력 기반 구축을 위한 성향이 짙어 조선 후기에 들어선 백성을 해롭게 하는 원흉이라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이 ‘철폐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서원은 우리나라는 물론 지역 교육 역사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 곳이다. 특히 서원은 정계에 진출해 있던 사림이나 지방 사림이 자신들의 학문적 우위와 정치적 입장의 강화를 위해 선배 학자들을 기리는 사당의 역할도 함께 했다.

거제지역에도 향교와 서원이 한 곳씩 보존돼 있다. 거제향교(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와 반곡서원이 그곳이다. 반곡서원은 비록 등록 문화재는 아니지만, 거제지역 유교문화 창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반곡서원은 한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68년)’에 따라 철거되는 아픔도 있었다.

하지만 거제 유학자들의 뜻으로 1906년 제단과 반곡서원 유허비를 세우고 단제를 치르다 1974년 다시 우암사를 비롯한 건물 일부를 중건하게 됐다.

▲ 복원 前 반곡서원 모습

다만 중건 과정에서 콘크리트 기둥과 시멘트 기와를 사용해 서원을 지은 탓에 반곡서원 원래의 전통적 이미지가 없어졌고, 이후 노후화로 서원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 반곡서원이 지난해 5월에서야 제 모습을 찾게 됐다. 3182㎡ 부지 위에 사업비 25억 원을 들여 우암사, 동재, 서재, 동록당, 비각, 고직사 등을 복원시킨 것.

반곡서원의 주벽 우암 송시열과 배향 인물

반곡서원은 1679년 우암 송시열이 거제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후진 양성을 계기로 거제 유림에 의해 창건돼 선현에 대한 제사와 후학 양성 및 향촌 교화 등 거제지역 유교문화 창달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원래 거제지역의 유교문화는 고현동 거제향교 시절부터 남명 조식의 학통을 계승했다고 한다. 그러다 송시열의 거제도 유배를 계기로 노론계 학문이 자리매김하게 된다.

송시열은 그의 나이 73세 때인 1679년 3월 25일부터 1680년 5월 15일까지 거제지역에서 귀양살이했다. 1년 남짓한 유배생활에도 그는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해 거제 유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송시열이 떠난 후 거제 유림은 유배지 배소에 간략한 사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를 만들어 선생을 추모한 것이 반곡서원의 시초다. 이 영향으로 한때 반곡서원 일대가 도론동(道論洞)이라 불릴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났다고 한다.

송시열의 유배 이후 1689년엔 죽천 김진규, 1722년 몽와 김창집이 연달아 거제면 동상리에 유배 오면서 거제지역은 유학의 절정기를 맞게 된다. 거제 유림은 중앙 정계의 당파와 관계없이 조선말까지 안동 도산서원을 정기적으로 찾아 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반곡서원이 처음 세워 질 때의 명칭은 ‘거제우암서원’(1690년대 초~1704년)이었으나 창건 직후 ‘거제서원’(1704년~1750년대), ‘거제반곡서원’을 거쳐 ‘반곡서원’으로 굳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곡서원의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 인물은 1704년 우암 송시열, 1726년 죽천 김진규와 몽와 김창집, 1856년부터 삼호 민진원과 단암 이중협, 1860년 전ㆍ후 계산 김수근 등이다.

그러나 반곡서원은 거제 유림이 사액서원(임금으로부터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은 서원)으로 만들려는 시도(상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액을 받지 못했다.

반곡서원의 주요 건물

반곡서원에는 묘우(신위를 모신 곳), 대문(외삼문ㆍ내삼문ㆍ협문), 강당, 동재와 서재, 고직사, 죽천 등이 복원돼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에 작은 방이 위치한 강당은 서원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또 동재는 제원들의 숙소로,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됐던 곳이다. 고직사는 현재 서원 관리원이 사용하고 있다.

또 새로 복원된 반곡서원에는 죽천이라는 샘(泉)도 함께 복원했는데 이 죽천은 원래 반곡서원 안에 위치한 샘이 아니라 반곡서원 서편 인근, 녹반곡(麓盤谷)에 있던 샘이다. 샘 위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고 전한다.

특히 이 샘물은 김진규 선생이 1689년에서 1694년까지 유배생활을 할 당시 매일 찾아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하면서 ‘죽천(竹泉)’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후 자신의 호로 삼기까지 했다.

강당 뒤에는 송시열 선생과 5명의 인물을 배향한 우암사가 있고 왼쪽에는 추사 김정희가 군자라 칭송했던 동록 정혼성(鄭渾性)을 모신 동록당이 있다.

또 강당 앞 왼쪽에는 복원하면서 옮겨온 반곡서원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이 유허비는 1879년(고종 16) 당시 진주목사 동양 신석유가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유허비는 반곡서원이 300여 년 전 송시열 선생의 유배생활로 시작됐고, 이후 배향인물의 추배와 사액상소운동, 또 서원철폐의 안타까움, 그리고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에 유허비를 세우고 글을 남긴 일까지 반곡서원의 변동사가 기록돼 있다.

반곡서원 유허비는 반곡서원의 역사를 축약한 글이지만, 반곡서원의 내력과 조선후기 거제 유교문화사의 큰 흐름을 알게 하는 값진 기록이다.

한편 반곡서원에서는 매년 3월과 9월 중정(中丁-음력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 제를 지낸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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